냉각탑 폭파 … 핵 위기 상징서 핵 해결 상징으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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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이 핵 프로그램을 신고한 지 하루 만인 27일 오후 각국 취재진, 미 국무부 및 국제원자력기구(IAEA) 관계자 등이 지켜보는 가운데 영변 원자로의 냉각탑을 폭파했다. 이날 외신들은 굉음과 함께 잿빛 연기가 피어오르며 냉각탑이 순식간에 파괴됐다고 전했다. [영변 교도통신=연합뉴스]

북한이 마침내 27일 오후 평안북도 영변에 있는 5MW급 흑연감속로형 원자로의 냉각탑을 폭파했다. 핵 시설 불능화를 상징하는 이벤트였다.

당초 알려진 것과 달리 폭파 장면은 CNN을 통해 생중계되지 않았다. 영변 지역에 위성 송출시설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하지만 현장 취재에 참여한 CNN과 한국의 MBC 등 5개국 언론사 취재진을 통해 폭파 장면은 시차를 두고 전 세계에 방영됐다.

북한으로선 이제 더 이상 5MW 원자로를 이용해 핵무기의 원료가 되는 플루토늄을 만들어 내지 않겠다는 선언을 다른 나라들에 한 것이다.

외형이 신라시대의 유물인 첨성대를 닮은 이 냉각탑은 1986년 실험용 원자로인 5MW가 가동되기 시작한 이래 한반도 상공을 지나는 정찰위성들의 필수 촬영 대상이었다. 핵 분열이 일어나면 원자로가 뜨거워지며 이 원자로를 식히는 과정에서 수증기가 발생한다. 그래서 냉각탑에서 증기가 발생한다는 건 원자로가 가동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미국은 94년 제네바 기본합의에 따라 영변 핵 시설이 동결된 뒤 북한의 합의 이행 여부를 판단하는 주요 방식의 하나로 인공위성을 통해 냉각탑에서 증기가 발생하는지를 감시했다. 제2차 핵 위기로 제네바 합의가 휴지조각이 되고 영변 원자로가 재가동되기 시작한 일이나,지난해 2·13 합의 이후 가동을 중단한 사실 등은 모두 이 냉각탑의 증기 발생 여부로 확인됐다.

또한 영변 핵 시설에서 북한이 추출한 플루토늄의 양을 추산하는 데도 냉각탑은 중요한 역할을 했다. 냉각탑 수증기를 통해 원자로의 가동 시간을 추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미국은 정찰위성 등을 통해 영변 원자로의 가동 상황을 하루도 빠짐없이 파악해 왔다. 그래서 북한이 제출한 원자로 가동 일지와 플루토늄 추출량의 진실성 검증에 큰 어려움이 없다고 자신한다. 물론 비가 오는 날처럼 기상 조건이 좋지 않은 날은 위성 사진으로도 판독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추출량 파악에는 다소의 오차가 있을 수 있다. 또 북한이 미국의 정찰위성을 교란시키기 위해 일부러 마른 종이를 태워 연기를 피운 적도 있다고 한다. 이처럼 영변 원자로의 냉각탑은 북핵 위기의 상징물이었다. 북한은 바로 이 상징물을 폭파함으로써 비핵화에 의지가 있음을 세계에 각인시키려 했다. 냉각탑 폭파 이벤트로 ‘핵 위기’의 상징에서 ‘비핵화’의 상징으로 이미지 변화를 노린 것이다.

이런 발상은 북한이 최근 집단 공연 ‘아리랑’의 내용을 일부 수정한 데서도 드러난다.

북한 당국은 8월부터 공연될 2008년도판 아리랑에 영변을 무대로 한 작품인 ‘영변의 비단처녀’를 새로 삽입했다. 조총련 기관지인 조선신보는 지난달 28일자에서 이 같은 사실을 전하며 “대외적으로 영변은 핵 시설의 소재지로 거론되는 경우가 많지만 국내에선 비단 생산의 거점으로 알려져 있다”며 “새 작품은 노동당의 인민생활제일주의 방침을 예술적 화폭에 담았다”고 보도했다. 냉각탑 폭파와 맞물려 북한이 영변의 이미지 변화를 꾀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예영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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