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정일의 新택리지] 화양 구곡 곳곳 송시열의 향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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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환이 '금강산 남쪽에 으뜸가는 산수'라고 평했던 화양 구곡은 충북 괴산군 청천면에 있다.

'택리지'는 "화양동은 파곶 아래에 있는데, 파곶의 물이 더욱 커지고 돌도 또한 기이한 것이 많다. 우암 송시열(宋時烈)이 주자(朱子)의 운곡정사(雲谷精舍)를 모방하여 이곳에 집을 지었다"고 기록한다.

원래 황양목(黃楊木)이 많아 황양동으로 불린 이곳에 송시열이 내려와 살면서 화양동(華養洞)으로 고쳐 불렀다.

송시열은 화양동 계곡 아홉 군데의 볼만한 곳에 이름을 붙이고 화양 구곡이라고 하였는데 입구에서 거슬러 올라가며 1곡부터 9곡이 펼쳐진다. 1곡은 경천벽이란 바위벽으로 공중에 높이 솟아 마치 하늘을 떠받친 듯하다 해서 지어진 이름으로 그 밑에는 화양동문이라는 송시열의 글씨가 새겨져 있다.

이 가운데 4곡 금사담(金沙潭)은 화양 구곡 가운데 가장 손꼽히는 절경이다. 깨끗한 물에 잠긴 모래가 금싸라기 같다고 해서 금사담이다.

이 위 높직한 암반 위에 송시열의 서재이자 별장이던 암서재(巖棲齋)가 있다. 암서재는 송시열이 굴피집을 짓고 제자들을 가르치던 곳인데 암서재 바로 옆에 환장사(煥章寺)라고 부르는 절이 있었다.

화양동서원이 한창 주가가 높았던 때 이 절의 한 스님은 이곳에 찾아오는 사람들의 형태만 보고도 그 사람이 어떤 당파에 속해 있는지를 정확하게 맞혔다고 한다.

예를 들면 만동묘 앞을 지날 때 공경하는 뜻이 안 보이며 활달하게 떠들고 지나가는 사람은 진보적이던 남인(南人)이었다. 또한 만동묘에 이르러서 쳐다만 보아도 감개무량하게 여기고 몸을 굽히는 사람은 보수적인 노론(老論)이었고, 산수 유람하듯이 만동묘 구경도 대충 끝내고 스님들을 곧잘 나무랐던 사람들은 진보적인 노론(老論)이었다는 것이다.

당색에 대한 강인한 집념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당색에 따라 옷의 디자인이나 머리 모양새까지도 달리했다고 한다. 노론 가문의 부녀자는 저고리의 깃과 섶을 모나지 않도록 둥글게 접었고 치마주름은 굵고, 접은 수가 적었으며 머리 쪽도 느슨하게 늘어서 지었다.

이와 달리 소론(少論) 가문의 부녀자는 깃과 섶을 뾰족하고 모나게 접었다. 이처럼 모난 디자인을 '당(唐)코'라 불렀으며 소론 가문을 당코로 속칭했던 것은 그 때문이었다.

그러한 당색이 오늘날까지 이어져 선거 때면 제각각 다른 빛깔의 옷을 입고 우리 민족의 미덕이던 공존이나 대동정신이 간 데 없는 것 아닐까.

신정일 문화유산 답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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