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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산사와 사신사호(捨身飼虎)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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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지난 4월 4일 일어난 강원도 양양군의 산불로 많은 피해를 보았지만 인명피해는 한 사람도 없어 불행 중 다행이 아닐 수 없다. 논어의 한 대목이 생각난다. 공자는 마구간에 큰불이 났다는 소식을 듣고 "사람은 다치지 않았는가"라고 물었다. 평범하면서도 당연해 보이는 이 물음 속엔 어떤 경우에도 인간이 으뜸이라는 공자의 인본사상이 담겨 있다.

양양화재의 경우 사람이 상하지 않아 공자께선 안도했을지 모르지만, 자연과 사람들의 생활에 큰 재앙을 안겨줬고 더더욱 낙산사가 불에 타버려 우리 국민에겐 크나큰 슬픔을 안겨줬다.

낙산사는 어떤 곳인가. 우리 민족의 오랜 역사 속에서 이 나라를 지켜온 호국 성지요, 동해의 파수꾼이다. 신라의 문무왕이 삼국통일을 이룬 뒤 의상대사는 일본의 침략을 신앙의 힘으로 막기 위해 문무왕 16년(676년)에 낙산사를 창건했다. 주신(主神)은 관음보살. 관음보살은 불교에서는 바다와 항해의 여신으로 일컫는다. 마치 가톨릭에서 성모마리아가 항해의 여신인 것처럼. 전설에 따르면 관음보살은 인도양의 보다낙가산(普陀落伽山)에 살았다 해서 이를 줄여 '낙산사'라 이름한 것이다. 그러므로 낙산사는 우리 민족의 영원한 '동해의 지킴이'다.

문무왕은 서거(680년) 후 화장하여 한줌 재를 동해에 뿌리도록 했다. 삼국통일이라는 역사적 위업에 걸맞게 거대한 능묘(陵墓)에 들 만도 한데 그걸 마다했다. 그는 한 마리 호국의 용이 되어 동해의 왜적으로부터 영원히 나라를 지키겠다고 발원한 것이다. 이 자리가 바로 경주, 감포 앞바다에 있는 이른바 대왕암이다. 의상대사가 낙산사를 세운 뒤 불과 4, 5년의 일이다. 1939년 고유섭과 최남주는 처음으로 대왕암을 찾았다.

한 분은 신라국 천년 역사상 가장 우뚝한 통치자로서 죽은 뒤에도 영원히 나라를 지키기 위해 동해에 몸을 던졌고, 또 한 분은 신앙의 힘으로 동해를 지키기 위해 호국사찰 낙산사를 세웠다. 한 사람은 정치지도자로, 또 한 사람은 종교지도자로 우리 민족 최초의 통일국가를 이룩한 빛나는 역사의 시점에서 몸과 마음을 동해에 바쳐 조국의 영원한 평화를 염원한 것이다.

지금 동해를 사이에 두고 독도 문제로 한.일 두 나라 사이에 큰 풍랑이 일고 있다. 이런 때에 동해의 지킴이인 낙산사가 불에 타다니, 그 어떤 역사의 섭리와 교훈이 있는 것이 아닐까.

불에 타 완전 소멸하는 대신 더 새롭게, 더 크게 태어난다는 새가 이집트 신화 속의 피닉스(불사조)다. 불교 설화 중 석가(釋迦)가 태어나기 전에 있었던 사실을 적은 본생담(本生譚)에 '사신사호(捨身飼虎)'라는 대목이 있다. 굶주린 호랑이를 살리기 위해 몸을 던져 호랑이 먹이가 됐다는 것이다. 가없는 소망을 이루기 위한 가없는 자기 희생이다.

낙산사가 꼭 그런 것 같다. 그 육신을 불태워 피닉스처럼 의상대사의 호국의 얼을 우리에게 더 부각하려는 큰 섭리가 아닐까. 낙산사는 불타면서 자기 희생의 사신사호 설법으로 우리에게 나라사랑(독도 지키기)을 위해 거듭나기를 일깨워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

독도를 지키려는 마음으로 노래하는 것도 좋고 데모도 좋다. 독도를 찾아 시를 읊는 것도 마음을 울린다. 그러나 그러한 행동은 단발적.일시적.즉흥적인 방법일 뿐이다. 보다 지속적.합리적.이성적인 방법, 즉 과학적 연구가 더 절실하다.

한 국가의 영유권의 근거는 역사적.국제법적으로 입증돼야 하는 것이다. 바로 그 점에서 지금 우리는 독도의 실효적 지배에 걸맞은 역사적.국제법적 권원(權原)을 과학적으로 확립했는지를 자성할 필요가 있다. 문무왕이나 의상대사처럼 몸과 혼을 다해 조국의 강토를 지키는 일, 그것은 바로 합리적인 연구 사업뿐이다.

유영구 명지학원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