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취재일기

KBS 사장 ‘면책특권’ 착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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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외환위기 책임론이 들끓던 1998년, 이신행 당시 한나라당 의원이 검찰의 출석 요구를 받았다. 기아차 재직 때 회사 돈을 횡령한 혐의 때문이었다. 이 전 의원은 거부했다. 야당으로 전락한 한나라당은 “정치 탄압”이라며 거들었다. 비난여론이 쏟아졌다. 이 전 의원은 결국 소환돼 구속됐다.

요즘엔 검찰 소환을 거부하는 배짱 좋은 정치인은 거의 없다. 대선 후보였던 정동영 전 열린우리당 의장은 12일 검찰 조사를 받았다. 앞서 이명박 대통령도 당선인 시절 특검 조사를 받았다. 장소가 검찰청사가 아니라 식당이었지만 말이다. 대통령 아들, 전직 검찰총장의 소환 사례도 적잖다.

그런 점에서 정연주 KBS 사장은 특별한 존재다. 그는 26일 검찰의 출석 요구를 거부했다. 17, 19일에 이어 세 번째다. 검찰은 그를 강제로 데려올 계획은 없다고 한다. 검찰은 통상 두 번쯤 출석을 거부하면 체포영장을 청구한다.

정 사장은 KBS에 1490억원의 손해를 입힌 혐의(배임)를 받고 있다. KBS가 2000년 국세청을 상대로 2300억원의 법인세 취소 소송을 낸 사건과 관련해서다. 법원은 2004년 국세청에 1990억원을 돌려주라고 판결했다. KBS는 2006년 항소심 도중 500억원만 받기로 합의하고 소송을 취하했다.

KBS는 500억원이면 합리적 액수라고 판단했다고 주장한다. 반면 검찰은 정 사장의 개인적 이유가 개입된 것으로 의심하고 있다. 이사회 연임 결정을 앞둔 그가 회사의 재정 상태가 좋은 것처럼 보이도록 서둘러 500억원을 받는 결정을 내렸을 수 있다는 것이다.

정 사장의 출석 거부 명분은 “공영방송의 중립성 훼손이 우려된다”는 것이다. 그의 논리대로라면 중립성이 필수적인 모든 기관의 장은 검찰 조사를 거부해야 한다. 게다가 그는 자신은 경영만 할 뿐 방송 제작에는 관여하지 않는다고 얘기해 왔다. 자신과 KBS의 보도 성향은 별개라고 하다가 말이 달라진 것이다. 1490억원은 국민의 돈(수신료)이다. 그 돈이면 공영방송이라는 문패에 걸맞은 명품 프로그램 수백 편을 만들 수 있다. 그래서 정 사장의 잘잘못은 꼭 가려져야 한다. KBS는 성역이 아니며, 정 사장에겐 면책특권이 없다.

이상언 사회부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