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꿈의여정 50년 칸타빌레] 99. 10년만 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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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가수 데뷔 30주년 공연을 준비하던 무렵의 필자.

가수 데뷔 30주년 공연을 준비하면서 샌프란시스코와 서울을 오가며 활동하는 것에 서서히 한계를 느끼기 시작했다. 지금처럼 휴대전화나 e-메일이 일반화된 시절도 아니었기에 나는 요즘 젊은 사람들로서는 상상조차 못할 큰 불편을 겪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그야말로 죽도 밥도 안 되겠다는 위기감이 들었다.

나는 남편과 진지하게 상의했다.

“내가 이제 노래를 부르면 얼마나 더 부르겠어요? 내 목소리가 절정에 있을 때 딱 10년만, 정말 열심히, 원 없이 노래 해보고 싶어요. 그런데 샌프란시스코에 살면서 그렇게 한다는 건 도저히 불가능해요. 그러니 한동안 서울에 가서 살았으면 해요.”

대화의 시작은 상의였지만, 이미 나는 마음속으로 90% 이상 결정한 상태였다. 그런 내 성격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남편이었기에 그도 말 없이 내 의견을 존중해주었다. 더욱이 그때는 큰딸 정아가 대학생이 돼 학교 기숙사에 들어가 있었고, 내가 둘째 딸 카밀라를 데리고 서울로 간다면 특별히 문제가 될 게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몸이 건강했고, 자신도 있었다. 어쨌든 당시 내 나이도 50대로 접어들었기 때문에 가수 활동을 더 한다고 해도 최대 10년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10년 후면 나도 예순이 될 것이다. 옛날 같으면 60세 노인이라고도 하지 않았던가! 지금도 이만큼 건강하니 이 상태를 10년은 유지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면 10년간은 지금처럼 우렁찬 목소리를 내지 않을까?’ 이렇게 내 나름의 계산이 있었고, 자신도 있었다.

결국 남편의 동의를 얻고, 카밀라와 함께 서울로 이사를 했다. 그 바람에 서울로 역(逆)유학을 온 카밀라는 서울국제학교(SIS)에서 중·고교 과정을 공부했다. 영어로 모든 수업을 진행하고, 학생도 대부분 외국에서 살다 온 내국인이거나 외국인이었기 때문에 카밀라가 적응하기에는 일반 학교보다 훨씬 수월했을 것이다.

미국에서 태어나 자란 아이를, 그것도 혼혈인 카밀라를 서울에 데려와서 공부시키겠다는 결심은 결코 쉽지 않았다. 남들은 어떤 위험을 감수하고라도 보내고 싶어했던 미국에서 거꾸로 아이를 데리고 들어오는 것이 과연 아이 인생에 플러스가 될 것인지 마이너스가 될 것인지 수없이 자문해보기도 했다.

하지만 그때도, 그리고 지금도 나는 청소년기를 보내기에는 미국보다 우리나라의 환경이 훨씬 더 좋다는 확신을 갖고 있다. 거의 신념에 가깝다. 두 딸 모두 청소년기에 우리나라에서 교육받은 것을 다행스럽게 여기고, 현명한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물론 전적으로 딸들의 교육을 위해 한 결정이었다기보다 엄마가 가수로서의 삶을 계속하려다 보니 생긴 이차적인 일이기는 했지만 말이다.

패티 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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