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중앙 시평

다시 처칠을 생각하는 이유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7면

초반 실패를 딛고 성공한 대통령으로 남은 역사적 선례가 적지 않다는 격려는 상투적일뿐더러 한가롭게 들릴 것이다. 새로운 각오로, 새 출발하는 이명박 정부를 지켜보며 필자는 20세기 영국 보수주의의 경험을 떠올리게 된다.

이명박 대통령과 참모들은 혹시라도 머릿속에 남아 있을 마거릿 대처의 신화를 지우고 대신 윈스턴 처칠의 교훈을 가슴에 새겨야 한다고 필자는 믿는다.

대처는 강한 정부, 시장경제, 신념의 정치를 내세우며 1980년대 보수당이 주도한 신자유주의 혁명을 이끌었던 인물이다. 당시 외형적으로 경제는 크게 성장했지만, 영국 사회 내부적으로는 끝없는 노사 대립과 사회적 갈등으로 점철된 시기였다.

반면 51년 두 번째 총리 자리에 오른 처칠은 이른바 ‘수정 보수주의’를 통해 영국의 황금기를 열었다. 강철 의지로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던 처칠이 복귀했을 때, 모두들 노정치가가 주도하는 보수 회귀를 염려했다. 하지만 처칠은 일반적인 예측과는 달리 이전 노동당 정부의 복지정책을 대체로 수용함으로써 이른바 보수-진보 합의의 시대를 열었다. 처칠이 주도한 이 합의의 시대는 이후 20여 년에 걸친 장기 호황과 사회적 안정으로 이어졌다.

이명박 정부가 시장개혁, 공공개혁, 교육개혁을 강하게 밀어 붙였던 대처 혁명을 벤치마킹하기보다는 처칠식의 ‘조용한 개혁’을 추진해야 하는 까닭은 적어도 두 가지다.

첫째, 이명박 정부의 정치적 기반은 처음부터 강한 보수와 디지털 신세대의 불안한 결합이었다는 점이다. 이명박 후보가 얻은 48% 지지의 상당 부분은 21세기 디지털 유목민이라는 점이다. 노무현 정부에 대한 디지털 유목민들의 실망이 2007년 이명박 후보 지지로 이어졌었지만, 새 정부의 초반 실책으로 이들은 불과 3개월 만에 촛불시위에 나서게 되었다.

5060 세대의 이명박 후보 지지가 보수의 확신에 찬 표현이었다면, 디지털 세대의 지지는 단지 컴퓨터 자판의 클릭 하나로 바뀔 수도 있는 가변적이고 유동적인 것이었다.

5060 세대가 기대한 보수 정부는 경제를 일으켜세울 강하고 적극적인 정부였지만, 디지털 유목민이 원했던 정부는 시민들의 요구에 민감하게 대응하는 ‘반응 정부’였다.

달리 말하자면, 정부가 이념적 보수에만 의지한다면 대처식 혁명에 따른 대립은 확산될 것이다. 반면에 정부가 디지털 유목민들에게만 주로 반응한다면 디지털 포퓰리즘의 위험은 커진다.

결국 이명박 정부는 밀어붙이기 개혁과 디지털 포퓰리즘 사이의 오묘한 오솔길을 찾아가는 지혜와 신중함을 갖춰야만 한다.

이명박 정부가 ‘조용한 개혁’의 길을 택해야 하는 또 다른 까닭은 개혁정치의 복합성 때문이다.

건전한 민주주의를 지켜가는 데에 정작 민주주의 이외의 요소들이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바와 마찬가지로, 시장경제를 향한 개혁은 시장경제 밖의 요소들에 의해 지탱된다.

이미 50년대에 처칠이 꿰뚫어 보았듯이, 시장경제의 활력을 위해서는 진보정치의 성과들-사회안전망과 사회적 유대감-을 일정하게 인정할 필요가 있다.

처칠은 이전 노동당 정부가 깔아놓은 의료서비스의 국영화, 사회안전망의 구축을 인정하고 그 기반 위에서 시장경제의 활력을 도모했다.

이명박 정부 역시 전임 정부들이 쌓아온 사회안전망의 구조와 그에 대한 시민들의 기대감을 아울러 껴안아야만 한다.

수돗물값 괴담, 약값 괴담에 흔들리는 민심을 따뜻하게 어루만질 때 비로소 경제개혁을 위한 지지가 확보되고 개혁의 동력이 마련된다.

세계화 역시 마찬가지다. 바깥 세계만을 쳐다보는 단순한 세계화보다는 시민들의 요구와 희망을 적절히 수용하는 ‘관리된 세계화’만이 현실에서 실현 가능하다.

처칠과 대처는 모두 역사에 남은 보수정치의 거인들이다. 하지만 대처의 시대는 갈등과 함께한 성장의 시기로 기록돼 있고, 처칠은 경제 성장과 사회 안정의 두 마리 토끼를 잡은 황금기로 기억되고 있다.

이명박 정부가 소란스러운 개혁 추구의 시대로 남게 될지, 혹은 안정적으로 내실있는 개혁을 이룩했던 시대로 남을지는 이제부터의 선택에 달려 있다.

장훈 중앙대 교수·정치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