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철환의 즐거운 천자문] 아름다운 화음 들려준 김희갑 - 양인자 부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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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초 안에 터지지 않으면 채널은 돌아간다.” 1990년대 초 이런 제목으로 책을 낸 적이 있다. ‘일요일 일요일밤에’ 연출 시절 경험적으로 체득한 잠언이다. 젊은 시청자라면 마치 먼지 쌓인 도서관에서 낡은 책 표지를 펼치는 기분이 들 수도 있겠다. 덧붙이자면 그땐 케이블이 없었고 민영방송(SBS)도 막 개국하던 즈음이다.

지금 소파에 앉아 리모컨을 손에 쥔 시청자들은 3초도 기다려주지 않는다. 그들은 ‘누가’ 나와서 ‘무엇을’ 하느냐를 보고 단박에 채널을 선택한다. 전문가가 나와 좋은 말을 하는 듯싶어도 기다려 주지 않는다. 잘생긴 배우가 나와서 인터뷰를 해도 영화 홍보를 하는 게 드러나면 금세 다음 채널로 이동한다. 그들은 예측 가능한(빤한) 걸 근본적으로 싫어한다.

시청률 상위권에 드라마와 리얼버라이어티가 포진한 건 스타와 스토리가 희한하게 버무려져 있기 때문이다. 궁금증이야말로 그들이 채널을 바꾸지 않는 원동력이다. “매력 있는 인물들이 오늘은 어떤 이야기를 만들어 가는가.” 제작진은 그 질문에 대한 답변을 구하기 위해 1주일을 고심해야 한다.

“정성을 기울였는데도 좋은 프로를 외면하는 시청자가 야속해요.” 시청률 낮은 프로를 만든 PD들의 속내가 대충 이럴 것이다. 내친김에 엉뚱한 상상을 해본다. 앞으로는 시청자가 화면을 고른 뒤 적어도 30초가 지나야 채널을 바꿀 수 있는 리모컨만 생산된다면 지금의 시청률 지도가 약간은 바뀌지 않을까. 싫어도 한번 고른 이상 30초 동안 프로를 지켜봐야 한다면 적어도 스타 위주의 겹치기 출연이나 벗기기 위주의 선정성 프로, 혹은 아이디어를 슬쩍 도용하는 베끼기 관행은 좀 줄어들 것이다.

TV가 건강해지려면 좋은 사람들이 방송에 많이 나와야 한다. 자연과 자유를 동경하는 그들은 번잡한 동네에 외출하기를 꺼린다. 어쩌다가 TV에서 ‘좋은 사람들’을 만나는 건 그래서 행운이다.

19일 방영된 KBS1 휴먼다큐 ‘사미인곡’. 작곡가 김희갑, 작사가 양인자 부부를 다뤘다. 부제도 ‘그 남자 작곡 그 여자 작사’다. ‘큐’ ‘타타타’ ‘그 겨울의 찻집’ ‘킬리만자로의 표범’. 이들의 히트곡은 한 시간 특집으로도 부족하다. 낯선 프로그램 제목 탓에 문제의 초반 30초가 흔들렸지만 그 후 30분은 주인공들의 삶에 푹 빠져들게 됐고 오후 8시쯤엔 TV를 아예 끄고 추억의 음반을 챙겨 들을 수밖에 없었다.

사전을 펴면 사람, 사랑, 사망은 거의 비슷하게 배치돼 있다. 함께 살고 함께 죽고 싶은 사람을 못 만난 게 안쓰럽다면 이들에게서 지혜를 빌려도 좋을 성싶다. 그들은 높일 때 높이고 낮출 때 낮출 줄 알았다. 성공하는 결혼의 비밀은 아름다운 음악의 탄생과 비슷하다. 리듬과 멜로디만으로는 음악이 완성되지 않는다. 중요한 건 하모니다.

주철환 OBS 경인TV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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