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패추방원년>2.요지경 '건설비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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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연말마다 정부 예산이 확정되면 우리의 일은 시작됩니다.
누군데 그때부터 일이 시작되느냐구요.다 알만한 중견 건설업체에서 벌써 10여년째 임원으로 일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영업상 비밀을 공개적으로 털어놓는다는 것이 직업 윤리상 옳지않다는 생각도 했지만 비자금 파문 이후 우리 사회의 부정.부패를 조금이라도 줄이는 데 일조하는 것이 더 옳다는 생각에 중앙일보의 취재에 응했습니다.
요즈음 많이 나아지기는 했습니다.그러나 아직도 비즈니스니 경영기법이니 하는 거창한 말보다는 봉투.로비에다 비자금 만들기가더 피부에 와닿는 곳이 바로 건설업계입니다.
자,우리 일이 어떤 일인지 한번 털어 놓아 볼까요.
우선 업무부서에서 예산안 속의 내년도 공공 공사 계획을 분석한 뒤 더 자세한 정보 수집에 나섭니다.
큼직한 발주처 별로 선이 닿는 담당 임원이 한 사람씩 정해지고 경우에 따라 그쪽 사람들과 스스럼없는 자리를 가질 수 있는전직 간부들을 스카우트하기도 합니다.
공사 발주가 다가오면 발주처.설계회사.유관부처등에 대해 본격적인 작업에 들어갑니다.우리들은 「주무르기」라 하지요.
가능한 모든 채널을 동원해 발주처의 담당직원은 과장급이,국장급은 부장.임원급이,기관장은 고위 임원이 직접 나서는 식으로 역할 분담도 합니다.
학연.지연을 따라 무조건 달라 붙는 것은 기본이고 상대방이 좋아하는 운동.음식등 취향 분석에도 나섭니다.
생일은 물론 연말연시.명절.휴가때마다 꼬박꼬박 선물을 보내는것도 잊지말아야 하고요.
새벽2시가 넘도록 집앞에서 기다리다 술에 잔뜩 취해 귀가하는상대방의 주머니에 은근 슬쩍 봉투를 찔러넣던 기억도 나는군요.
이렇게 해서 사전 준비를 다 해놓은 뒤 입찰이 벌어지면 이번엔 경쟁 회사들과의 관계에 신경써야 합니다.때로는 서로 물어 뜯는 경쟁이 벌어지기도 하지만 대부분 경쟁이라기 보다 담합이지요. 다시 말해 경쟁 회사들의 담합 깨기나 덤핑 입찰을 막으면서 미리 정해진 순번대로 돌아가며 나눠 먹기 위한 담합을 잘 이뤄나가야 하는 겁니다.
물론 입찰은 입찰대로 모양새를 갖춰야 하므로 바지저고리로 내세운 회사 직원에 대해 1인당 수십~수백만원 씩의 「떡값」을 잊지않고 챙겨줘야 뒤탈이 없습니다.다음번엔 우리가 충실한 들러리를 서고요.
공사를 따내더라도 그때부터가 또 시작입니다.
계약서 도장을 찍기 위해 관련 서류를 제출해도 무엇을 보완하라는 말 한마디 없이 덜렁 반려해버리거나 『두고 가라』며 질질끄는 공무원들을 만나면 속이 타는 것은 우리뿐이에요.
요즘은 사라졌지만 공사 하나를 따내면 수주액의 몇 %씩을 정치자금이라는 명목으로 뚝 떼서 거둘 적에는 아예「세금」을 내는것으로 생각해버리는 것이 맘 편하죠.공사규모가 클수록「세금 아닌 세금」의 규모도 커졌다는 것은 상식 아니겠습 니까.
공사의 첫 삽을 뜬 뒤에도 제때 공사 대금을 받지 못하고 감리.감독자들에게서 일일이 흠을 잡히면 공사가 제대로 이뤄질 리만무입니다.
신청하면 법정기일인 1주일이내 아무때나 줘도 되는 공사비 지급 규정을 예로 들어볼까요.
그 첫날과 마지막날 주는 것에 따라 이자만 몇억원씩 왔다갔다하기 때문에 도장을 찍는 담당자에게 밉게 보여선 안됩니다.
공사현장은 더욱 가관이에요.
공사가 시작되면 아예「월례비(月禮費)」라는 명목으로 경찰서.
소방서.관할구청 등 관계기관에 적게는 수만원에서부터 많게는 수백만원까지 빠짐없이 봉투가 들어갑니다.여기에다 인근주민.동네폭력배들과 사이비기자에서부터 때가 되면 양로원.경로 당에다 불우이웃돕기 성금에 이르기까지 일일이 신경을 써야해요.
결국 통상적인 경우 이익금을 공사비의 한 10% 잡으면 그 이익의 10%이상은 여기저기 내민 봉투에 담겨 사라진다고 보면됩니다. 더구나 적자를 보는 현장이라할지라도 그같은 봉투를 소홀히 하면 손해가 더 커진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그 많은 돈은 다 어디서 생기겠습니까.
가장 만만한 곳이 하도급업체입니다.
공사액의 85% 이하로 도급을 줄 수 없도록 정해져있지만 50~60%만 줘도 공사를 해줄 업체들은 수두룩하죠.
실제로는 50~60%만 준 뒤 세금을 우리가 다 대주는 조건으로 서류상으로 85%를 지급한 것처럼 꾸미는 2중계약을 하면나머지는 빼돌릴 수 있는 겁니다.
이따금씩 하도급업체나 재하도급업체로부터「역(逆)뇌물」이 들어올 때도 있구요.
물론 부당하다고 항의하는 업체들이 있기는 하죠.
그러나『더 이상 우리와 일 안 할 거냐』고 은근히 협박하거나『다른 공사도 주겠다』며 구슬리면 대부분 그대로 따라옵니다.
공사현장에서도 돈을 만들 수 있는 길은 수두룩합니다.
예를 들면 한 5㎞만 가면 흙을 파올 수 있는데도 10㎞ 이상 갔다온 것처럼 꾸미거나 인부들의 노임을 실제보다 늘려 허위장부를 만드는 것이지요.심지어 일하지도 않은 가공의 인부들을 장부에 올려 놓곤 해 공사가 끝나면「가짜로 판 목도장만 한 가마」라는 말도 생겼습니다.
또 콘크리트 속에 묻혀버리면 무엇이 들어갔는지 쉽사리 알 수없는 곳이 건설현장입니다.그러니 정 급하면 공사비의 20% 정도까지는 몰래 줄여서 공사해도 사람 눈에는 쉽게 표시가 안 납니다. 물론 공짜가 어디 있습니까? 이 모든 과정에서 감독자들에게 꼬박꼬박「봉투의 경제학」이 철저하게 적용됩니다.
비자금장부는 한달마다 반드시 없애는 것이 철칙입니다.
장부의 대.차변을 맞춰보고 잔액만 기억하는 식으로 매달 필요한 돈을 그때 그때 만들어가는 것이지요.
만약의 경우를 생각해 담당자들로부터는 구두보고만을 받는 것도잊어서는 안되지요.
이쯤되면 왜 그렇게 많은 돈을 줘야하느냐는 질문에 답할 차례가 된 것 같습니다.
일을 하면서 괜히 트집잡히기 시작하면 볼장 다보는 겁니다.
적당한 이익을 남기기 위해서 보다 빠르게 일을 진행하고 불이익을 받지 않기 위한「비용」으로 생각하는 편이 훨씬 낫다는 말로 대답을 대신 할까 합니다.
결국 누가 잘하고 못했다가 아니라 우리 모두가 한데 엉켜 돌아가다보니 이처럼 구조적인 공사판의 비리가 체질화된 것이지요.
다들 비리의 한 구석에서 부정.부패에 연루돼 있었다면 이제 비리를 없애가는 것도 우리 모두의 책임이 아닐까요.
더 이상의 대형 안전사고가 나기 전에 말입니다.
정리=홍병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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