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경자씨 27년만의 타히티 나들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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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2면

『웬일인지 전시회가 끝나니 허전하기 이를데 없네요잉.방안 가득히 물감접시를 벌여놓고서도 나이만은 아니야,절대 아니지 하면서도 그냥 바라보고만 있어요.』 지난해 11월 슬프고도 고독했던 그녀의 삶을 모두 까발려 놓은 듯한 대규모 회고전을 열었던천경자(千鏡子.72)화백이 새해들어 불쑥 여행가방을 꾸렸다.
남태평양 타히티로의 여행이다.
일흔두살의 나이에 먼 타히티로의 여행은 벅차 보인다.그녀 스스로도 다시는 이런 먼 여행은 불가능할 것같다며 『이번 여행이마지막 스케치여행이 될 것』이라고 말한다.
千화백은 9일 김포를 떠나 일본에 잠시 들러 물감과 화판 등을 챙겨 타히티로 들어갈 예정이다.아들 김종우(金鍾佑.38)씨를 앞세워 이달말까지를 여정으로 잡고 있다.
타히티는 19세기말 폴 고갱을 통해 이미 미술사(美術史)의 순례지가 된 곳.
『우리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미국 보스턴미술관 벽을 장식하고 있는 고갱의 걸작은 타히티라는 때묻지 않은 자연에비친 인간들속에서 인간본성에 담긴 단순함,신성(神性),그리고 신비함을 한 화폭에 담아낸 작품이다.
지는 해에도 눈가가 짓물러지는 황혼의 언덕에서 千화백은 왜 또다시 남국의 태양을 떠올렸을까.
『많이 변했겠지요잉.그래도 전에 보았던 야자수나 태양,그리고검은 피부의 여인들은 그대롤겁니다.』 千화백의 타히티행은 지난69년 이후 이번이 두번째다.
작열하는 태양과 백사장에 늘어선 야자수.젊은 시절 그녀를 사로잡았던 남국 풍물이 다시금 기억속에 되살아난 것은 마지막까지삶에 충실하려 하면 할수록 더욱 더 깊어지는 그녀 천생의 슬픔과 한 때문이다.
『언제 또한번 전시를 할수있을는지 알 수 없지요.그렇지만 그림쟁이가 일(그림그리는 일)을 멈출 수는 없는 것 아니것소.』지난해 개인전때 그녀는 매일 전시장에 나가 무려 7만명 가까운관람객이 들어오는 것을 봤다.
그녀는 전시회 막이 내린 후에도 자신의 그림앞에 서있던 사람들을 떠올리며 「그림이 무엇인가,무엇을 해야 하나」를 곱씹었다고 한다.
그속에서 작심한 타히티행은 마지막 그날까지 삶을,자신을 불태우지 않고서는 하루해가 뜨고 지는 것을 그냥 지켜볼 수만 없다는 그녀마음의 표현이다.
千씨가 타히티행에서 다시 만나보고픈 얼굴은 남국의 여인들이다. 검은 피부에 오똑한 코,그리고 깊은 눈.인종적 편견은 아니지만 그녀는 검은 얼굴에 우수를 머금은 깊은 눈을 대하면 그림이 쉽게 풀린다고 한다.이번 여행에서 그녀는 스케치를 잔뜩하는것은 물론 머리속을 온통 그곳 풍물로 채워 올 작 정이다.
『그림일 빼고는 전부 시들해요.사는게 그저 슬프고 외로운 것을 어쩌것소.그래서 이번이 마지막이 되든 어쩌든간에 그림을 찾아 나선 것이지요.』 새해벽두부터 남국의 태양을 찾아 나서는 그녀의 모습은 태양을 향해 돌진하는 이카로스의 날갯짓처럼 보인다. 그러나 슬픔이 됐든,한이 됐든 그 한가운데로 씩씩하게 돌진하는 노화가의 지치지 않는 열정은 짧은 인생에 담긴 깊은 의미를 다시한번 생각케 한다.
윤철규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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