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꿈의여정 50년 칸타빌레] 96. 서울시향 협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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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1985년 서울시립교향악단과 협연한 팝스콘서트에서 노래 부르고 있는 필자.

1985년 대중가수 최초로 서울시립교향악단과 협연한 제1회 팝스콘서트에 출연했다. 제의는 서울시와 교향악단 측에서 먼저 해왔다. 그런데 막상 리허설에서 만난 연주자들의 얼굴에는 뭔가 불만스러운 표정이 역력했다. 나 역시 불쾌했다. 클래식 대중화를 위해 자기들이 기획한 콘서트에 가수를 초청해 놓고, 이를 못마땅해 하는 것 자체를 이해할 수 없었다. 자존심이 크게 상했다. 하지만 그럴수록 오기가 생겼다. 실력으로 승부하는 수밖에 없었다.

1부는 시향의 연주만으로 진행됐다. 나는 2부에 출연할 예정이었다. 2부 막이 오르고, 내가 무대로 걸어나가자 조용했던 객석에서 환호와 박수가 터져 나왔다. 그 순간 나는 기세 등등해졌다. 연주자들은 나를 무시했지만 관객은 패티 김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대학에서 음악을 전공하고, 오랜 시간 기량을 닦은 클래식 연주자들을 평가절하할 뜻은 전혀 없다. 그들의 실력은 분명 인정한다. 하지만 대중가수로서 그들 이상의 경험과 관록을 쌓은 가수 패티 김을 어느 만큼은 인정해주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컸다.

나는 당시 잘난 척 거드름을 피웠던 연주자들의 코를 납작하게 해주겠다는 오기로 똘똘 뭉쳐있었다. 여느 공연보다 훨씬 많은 에너지를 쏟아 부었고, 그야말로 혼신의 힘을 다해 노래를 불렀다.

관객 반응은 말 그대로 열화와 같았다. 준비한 레퍼토리를 끝내고 무대 밖으로 나왔는데도 박수가 끊이질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지휘자가 무대로 다시 들어와 달라고 했다. 준비한 레퍼토리가 더 없는 상태였는데 말이다. 어쨌든 인사라도 한 번 더 해야 할 상황이라 일단 지휘자와 함께 무대로 다시 나갔다.

관객에게 교향악단 협연이라는 특성상 더는 레퍼토리가 없다고 양해를 구했다. 하지만 기립박수까지 보내오는 관객의 요구에 이미 불렀던 노래를 다시 부르는 초유의 ‘사건’이 일어났다. 한편으론 당황스러웠으나 가슴 뿌듯한 자부심도 느꼈다. 공연은 대성공을 거뒀다. 그때 나는 다시는 시향과 협연하지 않으리라 결심했다.

시향은 다음해 제2회 팝스콘서트에도 출연 제의를 했다. 처음에는 딱 잘라 거절했다. 그런데 오랜 세월 내가 존경해온 분까지 동원해 부탁하는 바람에 하는 수 없이 승낙했다. 이후에도 매년 출연 요청을 해왔지만 들어줄 수 없었다.

문화에는 우열이 없다고 한다. 흔히 국가는 국제사회에서의 위상, 사회·경제적 수준에 따라 선진국과 후진국으로 나뉘곤 한다. 하지만 선진국의 문화는 선진문화고, 후진국의 문화는 후진문화라고 그 서열을 정할 수는 결코 없을 것이다. 하물며 문화를 장르에 따라 우열을 가른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20여 년 전 우리나라 대한민국의 문화에는 그렇게 알 수 없는 칸막이가 있었다.

패티 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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