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취재일기

‘대박 환상’에 무너진 군 기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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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한 초급 장교가 던진 400억원대 군내 금융사기 파문 속에서 전 육군이 비틀거리고 있다. 피해자가 육군 전체(63개 부대)에 걸쳐 있다. 현역 군인 705명과 친·인척 등 민간인 100여 명이 개인별로 수천만원에서 수억원의 피해를 봤다. 18일에는 6200만원을 투자했던 중위 한 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군 당국은 2차, 3차 자살자가 나올까 전전긍긍하고 있다.

이상희 국방부 장관은 19일 계룡대 육군본부에서 군사령관급 지휘관을 소집, 긴급대책회의를 했다. 무너지는 군 기강을 바로잡고 피해자를 구제하기 위해서다. 회의 결과 주모자와 적극 가담자, 선의의 피해자를 분류해 군법에 따라 처리하기로 했다. 또 피해자 가운데 빚을 갚을 수 없는 2명은 개인회생제도를 통해 구제하는 방안을 강구하기로 했다. 군 당국은 나름대로 신속한 대응을 했다. 그래서 창군 이래 최대인 금융 사기 사건의 후유증이 일단 진정 기미를 보이고 있다. 하지만 사태가 이 지경이 될 때까지 육군 당국이 뭘 했는지 따져보지 않을 수 없다.

사실 육군은 이번 사건을 주도한 박모(25) 중위의 상습적 투기 성향을 미리 파악하고 있었다. 박 중위는 임관 직후부터 주식 등 투기에 지나친 관심을 보여왔다고 한다. 근무 시간에 주식 정보 등을 살펴보다 필수 교육과정인 초등군사반에서 퇴교 당할 정도였다. 올 초에는 정직 1개월이라는 중징계를 받았다. 기무사령부가 지난해 9월 금융사기 가능성을 해당 부대에 귀띔해 줬지만 육군이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육군은 박 중위가 인터넷을 이용한 피라미드식 금융사기라는 신종 수법으로 3사관학교 동기와 선후배를 대상으로 은밀한 사기 행각을 벌여 추적이 어려웠다고 변명한다. 하지만 관리 부실 책임을 면하기 어렵다.

물론 현역 장교·부사관들이 비상식적인 고수익 사기에 현혹된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그러나 이들을 비난만 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 3사관학교 출신들의 낮은 진급률과 상대적으로 열악한 봉급 수준 말이다. 30년간 군 생활하는 동안 30번가량 이사 다니고 중령이나 대령으로 예편해도 집 한 채 없는 선배들을 보며 투기 유혹에서 벗어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현역 장교들이 최소한의 품위를 유지할 수 있도록 현실적으로 처우를 개선하는 것이 유사한 금융사고를 막는 첫걸음이 될 것이다.

김민석 군사전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