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狂氣의 시대를 넘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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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신간 서적을 뒤지던 중 다소 도발적인 제목이 눈길을 끌었다. '미쳐야 미친다'. 무슨 뜻일까. 첫 장을 넘기고서야 그 의미를 알았다. 불광불급(不狂不及). 미치지 않으면 미치지 못한다는 말이다. 즉 세상에 미치지 않고 이룰 수 있는 큰 일이란 없다는 것이다.

한양대 정민 교수가 지은 이 책은 조선시대 후기의 매니어들에 관한 이야기다. 저자는 이 책에서 한가지 일에 몰두해 결국 그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면면들을 소개한다. '꽃에 미친 김군(김덕형)''장황(裝潢.표구)에 미친 방효량''책에 미친 이덕무' 등이 그들이다. '미쳐야 미친다'는 말은 그간 조선 후기 고전에 천착해 오다 이제 완성도 높은 결과물을 하나씩 내놓고 있는 저자의 자기 최면적 화두이기도 하다.

이처럼 오로지 한가지 일에 열중하는 사람들은 지금도 많다. 소와 함께 살면서 세계 최초로 장기복제의 길을 연 서울대 황우석 교수는 이제 더 이상 설명이 필요없다. 듣기에 좀 거북하지만 '똥 박사'도 있다. 한국과학기술연구원 박완철 박사는 20년째 인분(人糞)을 연구하고 있다. 환경 오염없는 깨끗한 세상을 만들기 위한 일념에서다. 이밖에 '딱정벌레 박사''나비 박사' 등 한가지 분야에 몰두해 큰 업적을 남긴 사람들은 수없이 많다. 일생일업(一生一業)의 신념으로 한 가지 업종에만 전념해 일류기업을 키운 기업인도 많다.

자기 일에 '미쳐' 묵묵히 한 우물을 파는 사람들의 삶은 아름답다. 거룩하기까지 하다. 언뜻 보기에 그들은 사회의 본류에서 벗어난 마이너(minor)처럼 보인다. 하는 일이 하찮게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그들이야말로 진정한 애국자요, 역사 발전의 주체다. 그들의 노력이 있기에 우리는 후손에게 보다 건강하고 풍요로운 삶을 담보해줄 수 있다.

이들에 비하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자화상은 너무나 초라하고 부끄럽다. 겉으론 아닌 척하지만 속으론 모두가 미쳐가고 있다. 그것도 천하게 미쳐가고 있다. 미치는 대상이 고상함과는 거리가 먼 돈이나 권력이기 때문이다.

얼마 전 서울의 한 주상복합아파트 분양에 약 7조원이 몰렸다. 시중 부동자금이 몇 백조원인 데다 당첨만 되면 현장에서 3억원을 버는 '돈 놓고 돈먹는'판이라니 누구를 탓하랴. 그러나 바로 그 무렵 평택의 한 여중생 가장은 "차라리 고아였으면 좋았을 걸…"이라는 일기를 남기고 목을 맸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정상이 아니다.

최근엔 대통령 부인이 졸지에 '××년'이 되는 일도 벌어졌다. 한 방송이 이 같은 내용을 보도했다. 그러나 현장에 있던 다른 기자는 앞뒤 맥락을 잘라버리고 문제의 부분만 보도해 이런 일이 벌어졌다고 주장했다. 진상이야 어떻든 누군가 미치지 않고서야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또 엊그제는 수원의 한 고등학교 교실이 잠시 사각의 링으로 바뀌는 일까지 벌어졌다. 상대를 코너에 몰아넣고 연달아 훅을 날리듯 교사는 여학생을 폭행했고, 이 광경은 휴대전화에 찍혀 고스란히 방송을 탔다. 정말 할 말이 없다.

우리 사회가 바야흐로 '광기의 시대'에 접어든 느낌이다. 특히 대통령 탄핵안 가결 이후 사회 전체에 무법이 판치는 가운데 도도히 미친 기운(狂氣)이 흐르고 있다. 1930년대 독일 베를린 같기도 하고, 60년대 중국 베이징(北京) 같기도 하다.

이 광기의 시대를 넘는 방법은 없을까. 이광치광(以狂治狂)! 그렇다. 모두 다 잊어버리고 한 군데 미쳐보는 것이다. 그런데 딱히 미칠 대상을 찾기가 쉽지 않다. 여유도 용기도 부족하다. 그런 면에서 1년에 열흘씩 서울에서 진부령으로, 다시 진부령에서 삼척으로 무작정 걷는다는 동료의 한 친구가 부럽다.

유재식 문화.스포츠담당 부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