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량, 법원따로 국민따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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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초등학생 여자 아이를 성추행한 범죄자에 대해 징역 몇 년을 선고해야 적당할까요.”

이 질문에 나오는 범죄명은 ‘13세 미만 미성년자 강제 추행’이다. 법정형이 징역 1년 이상이다. 이 범죄에 대해 법원이 실제 재판에서 선고한 형량의 평균은 징역 1년6월이었다. 하지만 일반 국민이 선고되기를 바란 형량은 징역 4년4월 정도로 나타났다.

실제 선고되는 형량의 세 배에 달하는 수준이다. 대법원 양형위원회가 15일 발간한 양형(量刑)에 관한 국민 인식 조사 결과 보고서 내용 중 일부다.

보고서에 따르면 일반 국민은 ‘뇌물 200만원을 받은 공무원’에 대한 적정 형량으로 징역 3년2개월을 제시했다. 이 역시 법원이 선고한 평균 형량(징역 10월)의 네 배에 육박하는 수준이다. 횡령죄에 대한 국민의 기대 형량은 2년6월인 반면 통계로 나타난 실제 형량은 10월이었다.

대법원 관계자는 “실제 재판에서 선고되는 형량이 일반인이 생각하는 형량 기대치에 크게 못 미치는 것으로 조사됐다. 향후 양형 기준을 마련할 때 국민의 양형에 대한 생각도 반영할 것”이라고 말했다.

양형위는 보고서 작성을 위해 올 1~2월 적정한 양형 기준을 마련하기 위한 기초조사를 실시했다. 일반 국민 1000명은 대면조사하고 법조인·경찰 등 전문가 2294명에 대해서는 설문조사했다. 양형위는 이번 조사 결과를 토대로 16일 공개토론회를 연다.

◇국민 기대와 현실 크게 달라=범죄의 중대성에 대한 평가도 일반인과 법원 간에 큰 차이가 있었다. 조사 과정에서 예시한 10가지 범죄 유형에 대한 일반인의 평가와 법정형의 서열이 확연히 다른 것으로 나타났다. 법정형으로 볼 때 법원은 ‘살인>주거 침입 절도강간=도주 차량>강도>13세 미만 미성년자 강제 추행>사기>존속 상해>절도>뇌물 수수>횡령(범죄 액수는 200만원으로 통일)’의 순으로 중요한 범죄로 판단한다. 그러나 일반 국민은 ‘아버지에게 전치 일주일의 상해를 입힌 경우’가 ‘자신을 때리는 동거남을 흉기로 살인한 경우’보다 더 중한 범죄라고 생각했다.

양형위가 2004~2006년의 형사재판 1심 판결 4만2000여 건을 분석한 결과 실제 선고되는 형량은 일반인이 느끼는 범죄의 중대성과 크게 다른 것으로 나타났다. 일반 국민은 화이트칼라 범죄인 뇌물·횡령이 절도·사기범죄보다 더 나쁘다고 생각했지만 처벌 결과는 반대였다. 설문에 참여한 전문가들은 10명 중 7명이 “양형이 관대하다”고 답변했다.

김승현 기자

◇양형(量刑)위원회=형사재판에서 형벌의 종류와 양을 정하는 ‘양형’ 기준을 마련하기 위해 지난해 5월 출범했다. 판검사와 변호사, 교수 등 13명의 위원으로 구성됐다. 내년 4월 마련될 예정인 양형 기준은 법적 구속력은 없지만 기준에서 벗어난 판결을 선고할 때 판사는 그 이유를 기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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