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더풀’ 히딩크의 마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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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딩크 러시아 감독이 15일(한국시간) 열린 그리스와의 경기에서 손가락을 펴 보이며 작전을 지시하고 있다. [잘츠부르크(오스트리아) AP=연합뉴스]

“지금은 16강 가능성이 50%다. 하지만 앞으로 하루에 1%씩 가능성을 높이겠다.”(2002년 한·일 월드컵 50일 전)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하겠다.”(2002 월드컵 개막 직전)

“난 아직도 배가 고프다.”(2002 월드컵 이탈리아와 16강전 승리 후)

거스 히딩크(62)의 말 속에는 뼈가 있다. 선수들의 감정을 컨트롤하고 자신감을 불어넣는 힘이 있다. 유로 2008에서도 마찬가지다. 히딩크의 ‘대화법’이 또다시 위력을 발휘했다. 물론 축구는 말로 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동기를 부여하고 정신력을 제어하는 것은 감독의 행동과 언어를 통해서다.

러시아가 15일(한국시간)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 발츠 지첸하임 슈타디온에서 열린 그리스와의 유로 2008 D조 2차전에서 지랴노프의 결승골에 힘입어 1-0으로 승리했다. 한 골 차지만 내용은 압도적이었다. 불과 나흘 전 스페인에 일방적으로 몰리며 1-4로 대패할 때와는 딴판이었다. 러시아의 젊은 선수들은 마법에 걸린 듯 히딩크가 주문을 거는 대로 움직였다. 러시아는 19일 스웨덴과의 3차전 결과에 따라 8강 진출을 바라볼 수 있게 됐다.

“패인은 우리에게 있다. 하지만 러시아 대표팀은 젊기에 남들이 3년 배울 것을 3일 만에 배울 수도 있다.”(스페인전 패배 직후)

‘잘되면 내 덕, 안되면 남의 탓’ 하는 게 인지상정이다. 히딩크는 그러지 않았다. 경험 부족과 수비진의 실수를 솔직하게 인정했다. 그러면서도 “짧은 시간에 많은 것을 바꿀 수 있다”며 고개 숙인 선수들에게 자신감을 줬다. “이번 경기는 결승전이나 다름없다. 경험 없는 우리 선수들이 전술적인 것은 물론 정신과 감정을 어떻게 제어해 낼지 궁금하다.”(그리스전 하루 전)

그는 이긴다고 장담하지 않았지만 젊은 선수의 오기와 투지를 묘하게 자극했다. 또 정신적인 것과 감정적인 면을 특히 강조했다. 지나치게 흥분해 경기를 그르칠까 걱정한 것이다. 그는 액션이 유난히 컸던 2002년과는 달리 그리스전에서는 거의 벤치에서 움직이지 않으며 선수들을 진정시키는 데 주력했다. 그리스전을 승리로 이끈 뒤 히딩크는 “우리는 여전히 아웃사이더다. 하지만 아웃사이더도 큰일을 해낼 수 있다”고 선수들을 격려했다. 힘 좋고 터프한 스웨덴전을 겨냥해 선수들을 독려하는 의도로 해석됐다.

히딩크가 러시아를 아웃사이더라고 말한 것은 아직 독일·프랑스·이탈리아 같은 축구 강국이 아니라는 의미다. 그럼에도 그는 “우리도 큰일을 해낼 수 있다”고 덧붙이며 스웨덴전 필승을 다짐했다. 또 “지금은 아니지만 언젠가 러시아는 세계 축구의 파워 하우스(power house·강호)가 될 것이다”며 비전을 제시했다.

한편 스페인은 후반 추가 시간에 터진 다비드 비야의 결승골로 스웨덴을 2-1로 제압하고 2연승으로 8강 진출을 확정했다. 14일 경기에서는 네덜란드가 프랑스를 4-1로 대파, 죽음의 조에서 맨 먼저 빠져나오며 8강에 올랐다. 이탈리아와 루마니아는 1-1로 비겼다. 이탈리아와 프랑스는 나란히 1무1패가 돼 탈락 위기에 놓였다. 18일 맞대결을 남겨 놓은 프랑스와 이탈리아는 최종전에서 이겨도 네덜란드가 루마니아에 지면 8강행이 좌절된다.

잘츠부르크(오스트리아)=이해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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