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옷 입지 못한 두 얼굴의 액션 히어로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66호 08면

인크레더블 헐크(Incredible Hulk) 감독 루이스 리테리어 주연 에드워드 노턴, 리브 타일러, 팀 로스 상영시간 115분 개봉 6월 12일 제작연도 2008

리안 감독의 ‘헐크’(2003)는 지나치게 많은 생각을 요구했다. 평론가들은 그리스 신화를 언급했고, 관객들은 우리가 알고 있는 ‘헐크’가 아니라며 독기를 내뿜었다. 5년 만에 다시 만들어진 ‘헐크’의 새로운 버전은, 정확히 그 반대편에서 생각 따윈 집어치우고 액션과 영웅 판타지에 모든 역량을 집중한다. 리안의 ‘헐크’를 외딴섬에 고립시키고 스탠 리의 원작 만화에 사다리를 잇댄 이 영화는, 이제 비로소 만화적인 리듬감을 되찾는다.

‘헐크’의 마지막을 장식했던 브라질의 리우데자네이루는 ‘인크레더블 헐크’의 시작점이다. 자기 안의 분노를 억제하고 싶은 브루스 배너(에드워드 노턴) 박사는 브라질의 음료수 공장에 취직해 백인 노동자로 살아간다. 언어는 익숙지 않고, 노동자의 삶은 낯설다.

브라질 언어를 아이처럼 힘겹게 연습하는 배너 박사의 모습은 이미 훼손될 대로 훼손된 ‘헐크’의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하고 싶은 제작진의 다부진 결의처럼 보인다. 그래서 ‘인크레더블 헐크’의 배우와 감독은 모두 새 인물이다.

서른여섯 살의 젊은 혈기를 지닌 루이스 리테리어 감독은 헐크를 아주 인간적인 영웅으로 포장한다. 빌딩보다 크고 초인적인 힘을 자랑했던 리안의 헐크에 비해 루이스 리테리어의 헐크는 몸집도 작고(2m70㎝의 키) 난폭함도 많이 줄었다. 연인 베티(리브 타일러)와 함께 나란히 서 있는 헐크를 보면 두 사람의 눈높이 차이가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우리 곁에 한층 가까이 다가온 헐크는, 대신 악을 물리치겠다는 영웅의식이 부쩍 늘었다. 배너 박사는 뉴욕 시내를 휘젓고 다니는 어보미네이션(팀 로스)을 물리치기 위해 그토록 잠재우고 싶어 했던 자기 안의 헐크를 직접 불러 세운다. 그의 출사표는 “나밖에는 저 괴물을 물리칠 사람이 없다”는 것. 이건 다분히 수퍼 히어로다운 의지 표명이다.

‘인크레더블 헐크’의 악당이 미 정부군이 만들어낸 괴물이라는 설정은 다소 혁신적인 부분이다. “제대로 한판 붙어보자”고 덤비는 어보미네이션은 두 얼굴을 가진 미 정부의 이중성을 연상시킨다. 하지만 ‘액션 만화’를 지향하는 이 영화는 애니메이션과 드라마, 영화가 뚝심 있게 지켜왔던 ‘헐크의 고뇌’를 심층적으로 담아내진 못한다. 무변신 날짜를 체크하며 분노를 조절하는 배너 박사의 안간힘은 그다지 힘겹게 다가오지 않는다.

배너 박사를 연기한 배우가 에드워드 노턴이라는 사실을 감안하면 이건 조금 의아한 일이다. 데뷔작 ‘프라이멀 피어’부터 ‘파이트 클럽’까지 자기 안의 괴물과 싸우는 연기에 도가 튼 에드워드 노턴은 이번 영화에서 흠 잡기도, 그렇다고 극찬하기도 모호한 야심 없는 연기를 선보인다.

‘에드워드 해리스’라는 필명으로 시나리오에 직접 참여하며 보여준 야망과 열정이 영화에선 이상하게 보이지 않는다. CG로 만들어낸 또 하나의 에드워드 노턴(헐크)은 불어 터진 몸뚱이를 허우적거리며 헌신하지만, 감정의 결을 보여주기엔 태생이 너무 과학적이다.

헐크를 사랑하는 여자 베티와 헐크를 죽이려 하는 아버지(윌리엄 허트)의 갈등 역시 다소 느슨하게 그려진 탓에 이야기의 한 축을 팽팽히 형성해 내지 못한다. 이는 어디에도 없는 새로운 것을 만드는 대신 어디에나 있는 익숙한 영화를 만들고자 한 감독의 이상한 노력에서 빚어진 결과다.

뤽 베송에게 영화를 배운 루이스 리테리어 감독은 선배의 비즈니스 감각을 제대로 물려받은 반면, 찬란한 실험 정신은 미처 배우지 못했다. 다른 수퍼 히어로 영화에 비해 야심이 다소 부족한 ‘인크레더블 헐크’는 또 하나 중요한 흥행 포인트를 간과했다.

우리가 헐크에게 기대한 것은 변신하고 싶지 않은 배너 박사의 절망과 불안이 뒤섞인 야릇한 눈빛이었다. 변신의 과정이 싹둑 잘린 ‘인크레더블 헐크’의 헐크는, 그러기에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헐크가 아니다. 이번에도 ‘두 얼굴 가진 사나이’는 제 옷을 입지 못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