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근 코믹한 추리소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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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호 12면

세탁소에 빨랫감을 맡기는 사람은 다양한 생활의 흔적도 함께 넘기는 셈이다. 가족 구성이나 개인 취향 같은 기본적 정보는 물론 특정 성분의 얼룩이 묻은 세탁물이라든지 주머니에서 미처 꺼내지 못한 영수증은 상당한 이야깃거리를 담고 있다. 갑자기 다량의 아이 옷을 세탁소에 맡긴다든지, 남자 혼자 살고 있으면서 묘하게 번쩍이는 화려한 여자 옷을 자주 내놓는다면 솔솔 풍기는 비밀스러운 속사정이 뒷소문의 먹잇감이 되고도 남는다.

경험과 재능만 충분하다면 세탁소 주인은 이런 흔적들을 이용해 손님의 아주 사적인 정보를 캐낼 수도 있다. 일본 소설 『끊어지지 않는 실』(사카키 쓰카사 지음, 노블마인 펴냄)의 세탁소 주인이 그렇다. 하지만 그는 다행히도 따뜻한 마음을 지녔다. 마을 사람들의 비밀을 여럿 알아내지만 그들을 도와주고 위로하는 데 사용한다.

도쿄 교외 마을의 오래된 상점가. 세탁소집 아들 아라이 가즈야는 대학 졸업 후 취직이 안 되자 가업을 이어받기로 한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오토바이를 타고 마을 사람들의 집을 방문해 세탁물을 수거하고 세탁이 끝난 옷을 배달한다.

아직은 서투른 풋내기일 뿐이지만 점차 일에 정이 들면서 화학과 패션에 대한 지식에다 세심한 서비스 정신을 갖춰 훌륭한 세탁 전문가가 되고 싶어진다. 그러다 우연히 몇몇 손님에게서 이상한 점을 발견한다. 그 수수께끼를 하나하나 해결하며 아라이는 가업과 가족, 그리고 마을에 대한 애정도 함께 키워 간다.

『네 가족을 믿지 말라』(리저 러츠 지음, 김영사 펴냄)에 나오는 ‘스펠만 사립탐정사무소’는 부부가 경영하는 가족 회사다. 28세인 맏딸 이자벨 스펠만은 집 겸 사업장인 이곳에서 열두 살 때부터 놀이 겸 일을 거들어 왔고, 열네 살이 된 막내 레이는 여섯 살 때 처음 미행 업무에 투입된 가공할 집안이다.

가업이 가업이다 보니 뒷조사·도청·감시·사기·뇌물 등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상 행동이다. 심지어 가족 간에도 증거 수집은 기본 전제고 대화의 태반은 신문과 협상이다. 딸의 남자친구가 어떤 놈인지 알아내기 위한 사생활 침해와 어른들에게서 용돈을 타내기 위한 막내의 협박은 부지기수일 정도.

이자벨은 탐정으로서 뛰어난 재능을 지녔고 다른 직업은 생각해 본 적도 없지만 슬슬 사생활 제로, 예의범절 제로의 괴상한 가족에게 회의가 들기 시작한다. 새로 사귄 남자친구에게 터프하고 와일드한 자신의 진짜 모습과 직업을 숨기게 되면서 일도 마음도 점점 꼬인다. 나름의 방식으로는 서로를 사랑하며 일을 진심으로 좋아하는 이 탐정 가족이 행복한 결말에 이를 수 있을까.

누군가 추리소설을 좋아한다고 하면 ‘잔인한 이야기를 좋아하나 보군…’ 하는 시선으로 보게 된다. 요즘 매니어층이 두터운, 케이블 TV를 통해 많이 방송되는 해외 범죄물 드라마도 과학수사의 기치를 높이 든 영웅들이 나와 섬뜩한 살인 사건과 인간의 잔인한 본성에 대해 고뇌한다.

그러나 『끊어지지 않는 실』과 『네 가족을 믿지 말라』는 추리소설 장르에 속하면서도 비교적 평범한 인물들이 등장하여 자그마한 사건에 얽힌 수수께끼를 풀면서 우리 주변의 일상사를 온화하고 코믹하게 다룬다. 이른바 ‘코지 미스터리(cosy mistery·포근한 추리소설)’라고 하는 추리소설의 한 갈래다.

20세기 초 영국의 저명한 추리소설가 애거사 크리스티의 할머니 탐정 ‘미스 마플’ 시리즈에서 비롯되어 ‘안락의자 탐정물’이라고도 불리며 일본에서는 ‘일상의 미스터리’라고도 한다. 대개의 추리소설에서 풍기는 암울하며 으스스한 분위기, 긴장과 스릴이 온몸을 옥죄는 독서가 아니라 가볍고 유머러스한 분위기의 느긋하게 즐기는 독서 경험을 제공한다.

카리스마 넘치는 탐정도 없고 엄청난 스케일의 사건이나 충격적인 반전도 없지만 작은 동네의 아마추어적 탐정에게 추리는 재미있고 주변에 도움도 줄 수 있는, 그냥 일상적인 삶이자 게임이다. 그러면서 언뜻 못 보고 지나쳤던 삶의 보석 같은 순간들을 부각하고 끊어지지 않는 실처럼 사람과 사람의 마음을 잇는, 사소하나마 현실을 변화시키는 감동이 바로 코지 미스터리의 매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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