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영빈칼럼>逆順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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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신임 이수성(李壽成)총리가 기자간담회에서 밝힌 시국관중 두가지 대목이 눈길을 끈다.그는 현시국을 민심이 흩어져 불안한 시점이라고 파악하고 민심을 안정시키는 일이 자신에게 맡겨진 중대과제라고 말했다.정경유착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높은데 재벌에대한 생각은 어떠냐는 질문에 그는 『권력을 가진 사람이 돈을 내라면 내고,때리면 맞을 수밖에 없지 않았는가』라고 반문하면서열심히 경제활동을 해온 이들은 애국심을 가진 사람들로 존중해야하며 갈등이나 배척보다는 서로 감싸안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신임 총리의 현실 진단과 기업관이 너무 솔직하고 명료하다는 점에서 李총리에 대한 기대와 신뢰가 간다.李총리의 짧은 답변중에서 우리는 현 시국의 문제점을 푸는 단서를 찾을 수 있다.李총리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느끼는 시국불안의 정체란 과연 무엇인가.
역사의 진실을 밝히고 사회정의를 바로 세우는 역사 청산작업이어째서 민심불안으로 작용하고 있는가.우선 이 의문을 풀어야 한다.고귀하고도 숭고한 역사적 작업이 어째서 환희와 희망으로 가득차지 않고 불안과 전전긍긍의 나날로 이어지고 있는가.나는 그이유를 역순(逆順)때문이라고 본다.바른 길을 가되 순서가 거꾸로기 때문이다.비자금 관행이라는 잘못된 과거를 청산하고 5.18의 부당성을 밝히는 역사 바로 세우기 작업을 진행하는 목표와과정에 문제가 있다는 말이다.
역사 바로 세우기는 문민정부 출발과 함께 안가 철폐→돈 한푼안받기→12.12와 5.18기소→비자금 수사→대선자금 공개→과거청산→정치개혁으로 이어지는게 마땅한 순서였다.그러나 이게 아니었다. 6.27 여당참패→김대중씨 정계복귀→민주-민정계 갈등→검찰의 5.18공소권 없음 결정→양김(金)씨의 대결→대통령의인기하락→비자금 폭로→5.18재수사→전두환(全斗煥)씨 구속→역사 바로 세우기로 이어졌다.
역사 바로 세우기라는 목표가 먼저 설정되고 순리적 과정을 거쳐 과거 청산작업이 이뤄진게 아니라 선거 참패,당내 불협화음,양金 대결구도의 정국전환을 위해 역사 바로 세우기라는 과정과 절차가 진행되었다는 의구심이 있기 때문에 많은 사 람들은 헷갈리고 불안해 한다.盧.全 두사람의 비리와 폭정에 분노하면서 그분노를 유도하는 현정권에 대해서도 무언가 불안과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고 있는 것이다.물론 정치적 목적을 위해 역사적 청산을우선 과제로 재등장시킬 수도 있다.
뒤늦은 목표설정이지만 똑바로 간다면 그나마 혼란도 줄어들 것이다. 그러나 혼란과 불안은 가중되고 있다.법과 원칙이 뒤죽박죽이고 그 목표가 헷갈리기 때문에 불안이 높아진다.바람과 감정이 지배하는 여론재판으로 몰아가니 이게 또 불안을 가중시킨다.
비자금폭로가 있자 30여 대기업총수들이 줄지어 피의자 신세가 되어 여론의 돌팔매를 맞았다.그러더니 어느날 어떤 기준,어떤 혐의인지도 모르게 달랑 8명의 기업총수만이 盧씨와 나란히 공범(共犯)입장에서 법정에 앉아 과거청산의 속죄양이고 들러리로 몰매를 맞고 있다.
李총리 말대로 오늘의 경제를 이끈 주역은 이들 대기업 총수다.오늘의 경제번영은 지난날 폭압과 규제속에서 달라면 주고,때리면 맞으면서 그래도 자신들의 직분에 충실해온 이들에게 상당한 공이 있다.「애국자」로 존경되고 추앙받지는 못할망 정 군사독재의 공범으로 몰리니 시국 주가가 1주일만에 95포인트나 떨어진다. 「공소권 없음」을 결정했던 검찰이 철저수사로 돌변하면서 새벽 기습영장 집행을 감행하고 全씨 비자금을 찾으려 공소시효가끝난 기업인들을 호텔로 불러 「협조」를 당부했다.대선자금에 대해선 단 한마디 언급도 없이 최규하(崔圭夏)씨의 증 언거부가 계속되자 崔씨 부인 통장을 全씨 차명계좌에 섞어 압수수색영장을받기까지 했다.이리되면 법이 법대로 서질 않고 역사 바로 세우기의 도덕성마저 손상된다.
역사를 바로 세우려면 목표와 과정이 순리에 맞아야 공감과 박수를 보낼 수 있다.역사청산보다는 이를 정파적 이익이나 정권 바로 세우기의 바람몰이로 몰아갈 소지가 보이면 불안이 생긴다.
답은 간단하다.역사 바로 세우기와 정권 바로 세우 기를 혼동치말아야 역사도 바로 서고 정권도 바로 설 수 있다.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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