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달아 높이곰 돋아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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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재미난 디자인이긴 하네요.』 우변호사는 호박반지와 함께 그가격표를 보더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값이 잘못 적힌 것이 아닐까요? 너무 싼 것같은데….』 『저도 그런 생각을 했어요.』 매점 주인을 찾자 어젯밤의 악사가나타나 반색을 했다.초로(初老)의 노인이다.
값은 가격표에 적힌대로였다.아내가 만든 것이라며 취미로 반지세공을 하고 있으니 재료값에 약간의 수고값만 얹어 파는 것이라했다. 노악사는 묻지도 않는데 자기소개를 늘어놓았다.
…1년 전에 정년퇴직을 했다.선박 수리공이었다.연금만 가지고도 편히 지낼 수 있지만 일하는 재미가 없는 생활은 무의미하고삭막하다.그래서 이 여관 주인에게 부탁해 매점을 차리고 마을 아낙네들의 「솜씨」들을 모아 팔고 있다.그리고 밤엔 취미를 살려 바이올린 악사 노릇을 하고 있는 것이다.이처럼 흥겹게 살 수 있는데 진심으로 감사하고 있다….
작은 행복이야말로 참행복일 것이다.그의 노후생활이 눈물이 핑돌도록 아름다워 보였다.우변호사도 감동한듯 얼마간의 웃돈을 반지값에 보태 건네며 어젯밤 연주에 대한 사례니 받아달라고 했다.노인은 사양했으나 간곡한 우변호사의 청에 정중 히 절하며 받았다. 바닷가로 산책나가는 아리영과 우변호사의 등을 향해 노인은 휘파람으로 『아카 돔보(あか とんぼ)』의 멜로디를 불었다.호의의 표시인 듯했으나 우변호사가 돌아보며 손을 저었다.
『우린 일본인이 아닙니다.』 휘파람이 갑자기 멎었다.놀란 토끼와 같은 모습으로 서있는 노인의 표정을 보고 웃다가 아리영은불현듯 소리쳤다.
『일본말의 「아카 돔보」.우리말로는 「빨간 잠자리」라는 뜻이라 하셨죠? 일본말의 「아카(あか)」는 혹시 우리말의 「빨간」「빨가」의 옛말 「발간」「발가」가 둔갑한 것이 아닐까요? 어머님 말씀으로는 우리말의 「ㅂ」소리는 일본에 가선 「ㅇ」이나 「ㅎ」 소리가 되었대요.또 우리말의 「ㄹ」받침은 일본말이 되면서대체로 없어졌다나봐요.그러니까 우리말 「발가」는 「아카」라는 일본말이 된 것을 알 수 있지요.』 우변호사는 한쪽 팔로 아리영을 안고 걸으며 뺨에 키스했다.
『아리영씨는 언어감각이 뛰어나니 일본말도 금방 마스터할 겁니다.한.일 비교 언어연구 같은 걸 해보시는게 어때요? 우리말에서 건너간 일본말을 두루 캐보면 흥미로울 텐데요.』 『그런 엄청난 공부,저는 못해요.
뒤늦게….』 『늦지 않았어요.아리영씨는 할 수 있어요!』 호박반지를 상자에서 꺼내 왼쪽 약지에 끼워주며 그는 힘주어 말했다.발트해가 눈부시게 반짝이고 있었다.
글 이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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