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명예혁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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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영국의 국왕 제임스 2세를 몰아내고 의회민주주의의 토대를 마련한 1688년의 무혈혁명은 「명예혁명(Glorious Revolution)」으로 불린다.혁명은 피를 부르게 마련이고 그 주체들은 성격이 원만하고 매력적인 인물일 경우가 드물다.크롬웰과 로베스피에르.레닌이 대표적이다.국왕 제임스 2세를 몰아낸 것은 오렌지공국(네덜란드)에 있던 그의 딸 메리와 사위 윌리엄3세였다.
발단은 종교문제였다.로마 가톨릭으로 개종한 제임스 2세는 가톨릭 신도들에게 불이익을 주는 법률과 관행을 폐지하는데 왕권을휘둘렀다.영국 교회는 물론 의회와 사법부도 왕의 전횡(專橫)에들고일어나 혁명의 위기감이 감돌았다.그해 11 월 윌리엄 3세가 군대를 이끌고 도버해협을 건너 런던으로 진군을 시작했다.제임스 2세는 협상을 시도하다 실패하자 국외로 망명했다.무혈혁명은 끝났다.12월10일이었다.
의회가 새로 소집되고 이듬해 2월 윌리엄과 메리는 공동으로 즉위,스튜어트왕조는 그대로 보존됐다.대신 의회는 왕권에 제도적올가미를 씌웠다.인권선언을 받아들이게 하고 모든 국사는 의회와협의하고 그 동의를 얻도록 했다.
1966년 『명예혁명』을 쓴 영국의 역사학자 모리스 애슐리는윌리엄 3세가 왕조를 무너뜨리는 혁명을 저지하기 위해 거사에 나섰다가 또다른 혁명을 시작한 결과가 됐다고 평가한다.
「명예혁명」의 별칭은 20세기 사가(史家)들이 붙였다.「상층계급에 의한 존경스러운(respectable)혁명」이란 점이 첫째다.왕조의 일관성을 유지하면서 거역할 수 없는 역사의 힘을서서히,순순히 받아들인 점이 둘째다.「혁명」이란 말이 어울리지않는 혁명이었다.
우리의 「역사 바로잡기」가 이 「명예혁명」이란 이름을 원용하고 있다.그러나 번지수는 한참 동떨어진다.대통령의 독주(獨走)에 입법부가 제도적 제동을 거는 모양새도 아니다.3당통합으로 「호랑이굴로 들어가 호랑이를 잡는」행동은 혁명적으 로 비칠 수도 있지만 그 방법은 「명예」와는 거리가 있다.
제도적 청산보다 응징적 청산,그 복합적 동기에서 과연 「명예」를 읽어낼 수 있을까.「역사 바로잡기」가 정치게임과 엉켜 역사 앞의 오만으로 흐르지 않게 되기를 빌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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