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철환의 즐거운 천자문] 진심은 칼끝과 같아 … 피해 없게 늘 조심해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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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정말 비하하려는 의도가 없었기 때문에 시간이 지나면 진심을 알아주실 거라 믿었다.”

촛불집회 관련 발언으로 곤경에 빠졌던 방송인 정선희씨가 울먹이면서 내뱉은 말이다. 정중한 사과와 함께 그녀는 결국 라디오 진행을 그만두었다. 문제의 언사가 방송을 통해 나온 지 보름 만의 일이다.

‘정오의 희망곡’은 제목 그대로 한낮의 무료함을 노래로 달래주는 오락프로그램이다. 촛불시위 도중 자전거를 잃어버렸다는 시청자 사연을 읽으면서 DJ는 ‘별 뜻 없이’ 건강한 시위문화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내비쳤다. 불과 30초 정도의 코멘트였다. 설마 이런 후폭풍이 몰아치리라곤 짐작조차 못했을 것이다.

생방송이 아니었다는 걸 보면 제작진 역시 대수롭지 않은 발언으로 간주했음을 알 수 있다. 처음 네티즌들이 문제를 제기했을 때도 일시적 반응쯤으로 여긴 듯하다. ‘며칠 지나면 수그러들겠지’. 그러나 그것이야말로 제작진의 순박한 희망사항이었다.

마지막 사과 내용에 포함된 세 단어(의도·시간·진심)를 통해 작은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의도는 빛의 성질과 비슷하다. 직진하기도 하지만 굴절·분산·합성, 심지어 반사도 한다. 목표지점에 안착한다는 보장이 전혀 없다. 그래서 종종 예기치 못했던 결과를 수반한다. 모든 프로그램의 기획의도에 ‘재미와 감동’이 들어 있지만 결과물을 보면 배신감이 들어 곧바로 채널을 돌리게 되는 건 바로 그런 연유에서다.

시간은 물의 성질과 비슷하다. 모든 걸 덮어줄 것 같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오히려 묻혀 있던 것까지 다 드러난다. 물은 떠오르게도 하지만 가라앉게도 만든다. 마실 수도 있고 씻을 수도 있지만 때와 장소를 잘 가려야 물과 친하게 지낼 수 있다. 방송은 타이밍, 곧 시의성이다. 어제는 아무렇지도 않던 말이 오늘은 엄청난 파장을 불러올 수 있다는 걸 알아야 한다.

진심은 칼의 성질과 비슷하다. 칼집에서 나오는 순간 그 칼로 자를 수도 있지만 찔릴 수도 있다. 깎을 수도 있지만 베일 수도 있다. 그래서 지혜와 용기와 절제가 필요하다. 칼끝이 어디로 향하는지 늘 조심스러워야 한다. 진심은 혀를 통해 나오지만 그 혀로 상처받는 사람이 생길 수 있다는 걸 감안해야 한다.

오조팔성십일군(五朝八姓十一君)이라는 말은 다섯 왕조에 걸쳐 여덟 개의 성을 가진 열한 명의 임금을 섬겼다는 뜻이다. 당나라가 망하고 송나라가 세워질 때까지 53년 동안 출세가도를 행진한 풍도(馮道)라는 사람 이야기다. 공리주의자일 수도 있고 기회주의자일 수도 있는 그를 버티게 한 최선의 방책이 자작시(‘舌詩’)에 고스란히 새겨져 있다. 참고가 될 것이다.

“입은 재앙을 불러들이는 문이요(口是禍之門) / 혀는 몸을 자르는 칼이로다 (舌是斬身刀) / 입을 닫고 혀를 깊이 감추면 (閉口深藏舌) / 가는 곳마다 몸이 편안하리라 (安身處處宇).”

주철환 OBS 경인TV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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