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와함께>"주방으로 떠난 치과의사" 이정하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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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다기망양(多岐亡羊)이란 한자성어가 있다.길이 너무 많아 방향을 못잡는 경우를 말한다.이땐 「우물을 파도 한 우물을 파라」는 속담이 들어맞는다.
한가지 일을 꾸준히 해야 성공한다는 뜻이다.
우리를 슬프게 했던 삼풍백화점 건너편에 제법 규모있는 한식점을 운영하는 이정하(李貞夏.45)씨는 이같은 상식과는 거꾸로 사는 사람이다.서울대치대를 졸업하고 남들이 부러워하던 의사생활을 10년만에 집어치우고 아무 인연도 없던 요식업 에 뛰어들었다. 그가 서울 명동의 한 건물 지하에 식당을 처음 연 때는 90년 가을.
현재의 위치로 옮기기까지 5년동안 행주치마를 입고 주방을 휘저었던 李씨가 지난 세월을 담담한 어조로 풀어놓은 『주방으로 떠난 치과의사』(차림)를 냈다.
홀연히 직업을 바꾼 속사정부터▶버스운전사를 소망했던 어린시절▶연세대 상대(商大)중퇴▶서울대치대 입학▶무의촌 의료봉사▶한학기만의 본과 자퇴▶공수특전단 의무병 생활▶치대 복학▶서울.대구.춘천등에서의 개업활동▶교수를 꿈꾸었던 짧은 독일 유학▶식당주인으로의 변신 등을 과장이나 꾸밈없이 재미있게 들려준다.텁수룩한 수염,구성진 목소리가 어울려 마치 소박한 촌부를 마주한 느낌이다. 그가 인생에 작은 반란을 일으킬 때의 나이는 마흔.이른바 세상 일에 의문이 없다는 불혹(不惑)에 또다른 출발을 했다.따라서 그의 40대론은 독특하다.
『부모.아내.자식을 위해 30대를 정신없이 보냈다면 40대는스스로의 인생을 개척할 때입니다.말처럼 쉽진 않겠지만 언제까지희생만 할 수는 없지요.자기가 진정 원하는 인생을 찾아야 하지않을까요.문제는 결단입니다.』 어찌보면 아무런 줏대없이 즉흥적으로 세상에 몸을 맡긴 것같이도 보이는 李씨의 삶이 신선하게 다가오는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그것은 바로 쳇바퀴 같은 일상에질려 새로운 내일을 꿈꾸면서도 어쩔 수없이 하루하루에 매달려 사는 일반인들의 억눌린 욕망을 대변하는 데서 연유할 것이다.
李씨는 자기 이야기를 『단순한 호기심이나 화젯거리로 넘기지 말아달라』고 당부한다.오히려 『하고 싶은 일을 하는 사람을 별종으로 생각하는 우리사회가 오히려 별종이 아니냐』고 반문한다.
특히 그는 신분과 지위를 우러러보는 우리 사회의 허위의식이 가장 역겹다고 꼬집는다.
중요한 것은 사람의 내면이지 겉모습이 아니라는 평범한 진리를강조한다.서울대를 나왔다는 사실 하나로 사람들의 주목을 받는 자체가 우리의 「못난 모 습」을 방증한다는 것이다.
『참다운 변신은 인간 내면의 혁명적 변화입니다.무엇을 하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생각하고 사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요.우리들은 너무나도 잘못된 교육 때문에 소위 의사.판검사등 고위직만을선호해왔어요.자기 개성과는 상관없이 허울과 명예 만을 추구하며살았지요.』 의사 때는 의사의 직분,주방장 때는 주방장의 책무를 한번도 잊지 않았다고.
오히려 원칙을 지키느라 많은 불이익도 감수했다고 한다.지금은주방 일선에서 물러나 모든이들의 아름다운 죽음을 위해 장의사가되고 싶다는 그가 또 어떤 탈바꿈을 꾀할지 궁금해진다.
박정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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