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일기>연희동의 적반하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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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도둑이 몽둥이를 들고 설친다」는 말이 있다.이른바 적반하장(賊反荷杖)이다.이 말이 요즘처럼 실감나는 적도 없다.연일 연희동 전두환(全斗煥)씨의 집으로 몰려드는 검은 대형승용차들,그뒷좌석에서 내려 보도진에게 손을 흔들어 여유를 보이며 全씨를 만나러가는 5공의 고위직인사들,5.18특별법제정을 「반민주적」이라거나 「좌파(左派)의 보복」이라고 강변하는 모습에 딱들어맞는 말이다.
여기에 全씨측은 『가만히 있지 않겠다』는 협박을 서슴지 않는다.당당하다.도대체 누가 쿠데타를 벌였고,누가 양민을 학살했고,누가 헌정을 파괴하고 정권을 강압으로 찬탈했는지 어리둥절하다.누가 잘못을 참회하고 반성해야 하고,누가 꾸짖고 책임을 물어야 하는지도 헷갈린다.수십억달러를 외국으로 빼돌려 나라경제를 들어먹은 독재자의 부인이 하원의원에 당선되는 그런 이웃나라와 막상막하(莫上莫下),난형난제(難兄難弟)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全씨측은 변호권 항변권을 주장한다.「국민의 권리」라는 것이다.매우 편리한 기억체계다.자신들이 안기부.보안사.경찰을 동원해 정치인.언론인.학생.노동자들을 물고문.전기고문.통닭구이고문하던 것은 기억에 없는 것 같다.모든 국민이 인권을 얘기할 수있어도 적어도 全씨측은 도덕적 자격이 없는 것 같은데도 입만 열면 「인권」이다.
全씨측은 또 『이런 상황이 계속되면 나라에 혼란이 오고 경제가 걱정』이라는 말도 한다는 소식이다.코미디가 아닐 수 없다.
다른 사람도 아닌 전방에서 군대를 빼돌려 국가의 안위를 위태롭게 하고,수천억원의 정치자금으로 정치와 경제의 근 본질서를 왜곡시켰던 장본인의 입에서 그런 주장이 나오니 실소를 금할 수 없다. 하지만 긍정적 효과도 있다.全씨측은 역사를 바로 세우는일이 왜 필요한지를 자신들의 행동을 통해 역으로 입증하고 있다.과거에 12.12와 5.18을 다뤘지만 왜 그것만으로는 불충분한지도 이해하게 만들고 있다.다소 무리를 해서라도 특별법을 왜 만들어야 하는지 근거도 제공해주고 있다.全씨측이 할 일은 「민주」「인권」「보수」「우파(右派)」「나라걱정」같은 괜찮은 단어들을 모욕하는게 아니라 진정한 참회와 고백으로 진상규명에 협조하고 용서를 구하는 것이다.
김교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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