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비자금과 기업총수 사법처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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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노태우(盧泰愚)전대통령의 엄청난 비자금 축적사실이 입증되면서우리나라와 국민에게 미친 파장은 이루 헤아릴 수 없다.권좌에 앉아 기업으로부터 돈을 뜯어 이른바 정치자금으로 쓰고 남은 돈을 차명계좌 등으로 숨겨둔 일은 盧씨 개인 뿐만 아니라 나라와민족 전체의 수치고,이에 대한 철저한 수사와 책임소재를 밝혀 이제는 더 이상 정경유착이 발 붙일 수 없도록 해야 함은 말할나위도 없다.
盧씨 비자금사건은 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일부 잘못된 정치군인들이 저지른 부패의 고리를 드러내 우리에게 새로운 반성의 계기를 마련해주었다.검찰은 기업이 대통령에게 바친 돈을 뇌물로 보아 이를 사법처리할 방침인 것으로 보도되고 있다.
법앞에 만인이 평등하고 죄를 지은 사람은 그가 누구든 공정한재판절차를 거쳐 책임을 물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그러나 이 시점에서 盧씨에게 준 돈을 뇌물로 보고 그 기업의 총수들을 일괄적으로 기소하는 것이 과연 옳으냐하는 것은 깊이 음미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5공청산과 관련된 국회청문회에서 어느 기업의 총수는 당시 일해재단에 헌금을 바친 것은 살기 위해서였다고 언급한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12.12군사반란과 5.18광주사태를 딛고 들어선5공정권이 국제그룹을 해체시킨 사실을 목격한 기 업의 총수들이권력을 휘두르고 있는 대통령의 요구에 기업의 파탄을 무릅쓰고 저항하기를 기대할 수는 없다.특히 수사권과 국가의 소추권을 독점하고 있는 검찰이 권력형 비리를 철저히 파헤치지 아니하고 이를 축소은폐하고 있었던 상황에서는 더욱 그러하다.이런 점에서 기업이 대통령에게 헌금한 것은 법적으로나 도덕적으로 비난받아 마땅하나,이를 일률적으로 뇌물로 보아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하는것은 결코 바람직한 일은 아니다.
기업은 인적.물적 설비를 갖춰 이익을 추구하기 위한 경제조직이다.우리나라의 과거 정권이 부패하고 폭력화한 상황에서 우리 경제를 이만큼 끌어올린 것은 그래도 기업의 노력임을 부인할 수없다.자원이 많지 않은 나라로서 우리가 살기 위 해선 기업의 국제경쟁력을 높여야 하고,국가와 국민이 다같이 이를 뒷받침해줘야 한다.盧씨의 비자금사건과 관련해 우리 기업은 해외시장에서 커다란 타격을 받고 있는 것으로 보도되고 있다.수주계약이 연기되거나 다른 나라의 경쟁회사에 빼앗기 고,그 기업활동에 많은 장애가 따르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기업의 총수들이 모두 기소당하는 경우 해외신용도를 더욱 떨어뜨려 국제경쟁력을 잃게 함으로써 우리 경제의 주름살을 깊게 할 우려가 있다.세계가 무한경쟁시대에 접어든 이시기에 기업을 위축시켜 경제의 회생을 어렵게 하 는 것은 교각살우(矯角殺牛)의 어리석은 꼴을 보이는 것이다.그렇다고 해서 기업윤리를 저버린 부도덕한 기업을 그대로 보호해야 한다는 의미는 결코 아니다.기업이 특혜를 받고자 아주 부당한 방법으로 뇌물을 바쳤다든가 盧씨의 비자금을 숨기 는데 협조한 경우까지 이를 불문에 부칠 수는 없는 일이다.
기업이 지난날 대통령에게 돈을 바칠 수밖에 없었던 상황에 대한 책임은 정치권이 먼저 져야 하고,권력의 눈치를 살피고 권력형 비리를 숨겨온 검찰의 책임도 그에 못지 않다.권력을 쥐고 비리를 저지른 장본인에게는 엄중하게 책임을 묻고, 지난날의 잘못된 관행을 바로잡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
물론 기업도 지난날의 정경유착에 대한 잘못을 뉘우치고 기업윤리를 확립해 시장경제질서를 바로 세우는데 이바지해야 한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없는 사람이 먼저 저 여자를 돌로 쳐라』(요한8:7)고 한 성경말씀을 묵상하면서 우리 모두는 바르고 떳떳한 삶을 살기로 다짐해야 한다.盧씨의 비자금사건과 5.
18문제로 들끓는 이 시기에도 우리는 경제를 살려 야 하고,경제인들이 심기를 바로잡아 경제활동을 펴나갈 수 있도록 이성적으로 대응하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서울대교수.상법) 양승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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