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책읽기>"랩소디 인 블루" 배수아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7면

행복한 책읽기는 도처에 있다.주제가 주는 감동에도,형태의 완벽한 조화에도 그것은 있다.때론 한마디 새콤한 말이 뇌리를 서늘하게 스친다.때론 웅장한 스펙터클이 좁은 가슴을 범람하는 저수지로 만든다.배수아는 『랩소디 인 블루』에서 교 묘한 트릭으로 독자를 속인다.그 트릭은 일종의 화살이다.한번 박히면 결코빼낼 수 없어 사수의 몸 속으로 스스로 화살이 되어 날아가는 것 외에는 달리 어쩔 길이 없는.
작가는 첫머리를 『문득 나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싶습니다』로 시작한다.독서의 문턱에서 독자는 소설속의 「당신」이 바로 자신이라고 생각한다.작가는 자신의 지난 이야기를 들려주려는 참이고,독자는 한 개인의 아픈 고백을 들어줄 마음의 준 비를 해야 한다.그러나 작품을 읽어나가다 보면 독자는 그 이야기가 작품 속의 「나」가 그의 옛선생님이자 그가 떠나온 애인에게 보내는 편지임을 알게 된다.발신자는 작가가 아니라 화자이고,수신자는 독자가 아니라 작품 속의 한 인물인 것 이다.
회상은 작품을 테두른 외부적 형식으로부터 작품 내의 구성적 형식으로 바뀐다.그렇게 해서 무슨 효과가 나타나는 것일까.
이야기의 내용은 작가가 이미 『푸른 사과가 있는 국도』를 통해 보여주었던 것과 같다.신세대의 기나긴 방황이 좀더 극적인 긴장을 거치며 내적 정화로 끝맺음한다.독자는 감정이입의 동물이라서 책을 읽는 동안엔 그 이야기가 바로 자신의 이야기라고 느낀다.하지만 독서를 끝내고 나면 그것은 여전히 타인의 이야기일뿐이다.책을 읽을 때 그것은 동일시를 낳으나 책장을 덮고 나면그것은 잊혀진다.
배수아의 트릭은 그런 환멸적 동일시를 차단한다.독자는 문득 이 이야기가 타인의 이야기임을 알게 된다.그러나 그것을 안 순간은 이미 작품 속에 깊이 빠져든 순간이다.그는 작품 밖으로 나갈 수 없다.좋든 싫든 그는 그곳에서 살아야 한 다.그렇게 해서 독자는 타인으로서 작품 안으로 참여하게 된다.이 작품 속의 인물들은 나와 무관한 남들이다.그러나 그 타인은 나 밖에 있지 않고 내 안에 있다.나는 이들의 삶을 이들과 함께 겪어야만 한다.내 삶의 자리갸 여기이므로,독 자는 그렇게 또 하나의작중인물이 된다.
동일시로부터 망각으로 이어지는 환상적 책읽기는 이제 없다.대신 동참과 토론의 공터가 떠오른다.잘 속인 결과로 작품은 결코끝나지 않는다.그 곳에 빈자리가 있기 때문이다.
무수한 독자들이 저마다 다른 타자로 가담할 그 자리가.
(문학평론가)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