높은 구름 사이로 이름 새긴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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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코노미스트

신동빈 롯데 부회장의 어깨가 한결 가벼워질 듯하다. 아버지 신격호 회장의 숙원사업인 112층, 높이 555m의 ‘제2 롯데월드’ 건립이 더 이상 불가능한 일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국방부는 5월 19일 제2 롯데월드 건립 허용에 대해 모든 방안을 대상으로 검토 중이라고 밝혔다. 롯데 측은 조심스러운 입장이지만 “120층, 130층도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롯데물산 김명수 상무에게는 지난 10여 년간 이루지 못한 미션이 하나 있다.‘제2 롯데월드’ 건립이 그것이다.

국방부와 공군이 잠실 제2 롯데월드 건립을 허용하는 방안을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지면서 세간은 떠들썩하게 잠실 제2 롯데월드 건립 가능성을 점쳤지만 그는 “이제야 가닥이 잡혀갈 뿐”이라며 무덤덤한 반응이다.

지난해 7월 군 당국이 성남 서울공항의 항공기 이착륙 안전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는 이유로 반대해 제2 롯데월드 건립이 무산됐을 때도 그는 조용히 때를 기다렸다.

112층은커녕 삽질 한 번 제대로 못했는데 ‘지난 10년 동안 회사에서 내쫓으려고 하진 않았느냐’ ‘도대체 무엇을 했느냐’는 질문에 그는 간단히 대답했다.

“회사에는 어차피 사람이 필요한 것 아니냐. 개인의 문제로 사업이 늦어지는 것도 아니고 허가가 안 나서 이렇게 됐다. 나는 그저 엔지니어일 뿐이다.”

안전 문제에 대해 확고한 입장도 보였다. “비행기가 고층건물에 부딪히는 사고가 일어나기라도 한다면 누구보다 롯데가 볼 피해가 막대할 것이다. 롯데가 손해 보려고 뛰어들었겠는가.”

그리고 그는 이렇게 되물었다. “초고층빌딩이 정말 수익성 있는 사업이라고 보느냐”는 것이다. “초고층빌딩의 경우 3.3㎡당 건축비가 일반 건축물에 비해 2~3배 더 들어간다.

사무실 지어서 임대료 받으려고 하는 것도 아니다. 개인적으로 상암동에서 추진 중인 초고층건물도 힘든 사업이 될 것으로 보는데 롯데처럼 땅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라 더욱 그렇다.”

김 상무는 신격호 회장의 숙원사업이 “수익보다 사회공헌”이라고 설명했다. 신 회장은 실적을 꼼꼼히 챙기기로 유명하다. 올해 초 퇴임한 40년 ‘롯데맨’ 이종규 전 롯데햄 사장은 신 회장을 만날 때마다 이런 질문을 듣기도 했다.

“자네, 올해 무엇을 잘했나?” 이 전 사장이 “잘한 것 없다”고 대답하면 “그럼 올해 무엇을 못했나?”고 물어봤다는 것이다. 신 회장은 장기적인 비전도 비전이지만 반드시 당장의 실적에 대해 묻는다.

그런 신 회장이 롯데물산의 존재를 인정한 것 자체가 얼마만큼 제2 롯데월드 건립에 대한 집념이 강한지 보여주는 것이다.

신 회장은 군이 비행안전을 문제 삼는 것을 알면서도 왜 꼭 초고층건물을 고집하는 것일까.

우선 “외국 관광객들에게 언제까지나 고궁만 보여 줄 수는 없다. 세계 최고의 그 무엇이 있어야 외국 사람들이 즐기러 올 것이다. 세계 최고의 건물이란 것 자체가 자동적으로 좋은 광고 선전이 된다”는 그의 말처럼 관광 인프라를 구축해 사회공헌을 한다는 의미가 있다.

그러나 초고층건물 전문가 고려대 김상대 교수의 말에 따르면 롯데물산 김 상무의 말과는 달리 초고층건물만이 송파구 신천동 일대 8만8000㎡ 대지에서 최대의 수익을 뽑아내는 길이라고 한다.

“50층 2동 짓는 것보다 100층 1동 짓는 것이 공사비는 더 든다. 건물 하나만 놓고 보면 분명 손해다. 그러나 두바이를 보자. 160층 건물 하나로 인해 주변 건물 임대료가 훨씬 올라간다. 적어도 30% 올랐다. 주변에 30~40개의 건물이 새로 들어섰다. 160층짜리 건물 지으면서 들어간 돈 다 뽑은 것이다.”

만약 112층짜리가 초고층건물이 아니라면? 김 교수는 타워팰리스 예를 들었다. “당초 초고층건물을 지으려던 계획이 주민 반대로 주상복합아파트가 됐다. 그 결과 70층 3동이 들어서 지역밀도만 더 높아졌다”고 그는 설명했다.

초고층건물을 통해 롯데가 잠실벌에 롯데호텔, 롯데백화점 등을 연결하는 롯데타운을 건설하려는 계획이 롯데의 수익 측면에서나 주변 시민들의 교통여건을 고려한다면 맞다는 얘기다. 신 회장의 괜한 고집이 아니라는 게 김 교수의 설명이다.

신동빈 롯데 부회장도 아버지의 뜻을 잘 알고 있다. 그는 여러 차례 공식석상에서 제2 롯데월드 건립에 대한 강한 의지를 보여줬다. 신동빈 롯데그룹 부회장은 최근 롯데백화점 모스크바점 오픈 행사를 앞두고 가진 기자간담회에서 제2 롯데월드 건설 사업을 계속 추진하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그는 “몇 년 전 미국 뉴욕발 서울행 비행기에서 이명박 대통령을 우연히 만난 것을 계기로 개인적인 친분이 있다”고 강조한 적도 있다. 이명박 대통령과의 인연을 강조한 이면에 제2 롯데월드 건립에 대한 기대가 포함돼 있었던 것이다.

신동빈은 이명박과 통했나

지난 4월 말 청와대에서 열린 ‘투자활성화 및 일자리 창출을 위한 민관 합동회의’에서 신 부회장은 “초고층 잠실 제2 롯데월드 건설을 추진하는데 군사시설과 관련된 고도제한 문제 때문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제안하는 등 정부에 롯데의 의지를 알리는 데도 열심이었다.

신 부회장과 이 대통령의 친분을 묻자 장병수 롯데그룹 홍보실장은 확대해석하지 말라며 “이 대통령이 서울시장 시절부터 이 문제에 대해 알고 있는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신동빈 부회장은 2004년 10월 롯데그룹 정책본부장(호텔롯데 소속)에 취임한 이후 그룹 경영 전면에 나서고 있다. 취임 후 신 부회장의 최대 관심사는 식음료, 유통에 치중한 그룹을 중화학그룹으로 변모시키는 데 있었다.

2003년 호남석유화학은 KP케미칼(단독)과 현대석유화학(LG화학 공동)을 인수했다. 최근에는 신 부회장이 해외시장 진출과 제2 롯데월드 건립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기준 롯데물산 사장은 신 부회장의 행보에 따라 보직이 이동되고 있는 사람 중 한 명이다. 올해 초 제2 롯데월드 건축주인 롯데물산 사장에 부임하기 전까지 지금은 롯데대산유화에 통합된 현대석유화학 2단지와 KP케미칼의 대표이사를 각각 맡은 바 있다.

때를 보면 신동빈 부회장이 중화학그룹 만들기에 힘쓰던 그 시점부터 지금까지다. 14년 동안이나 지지부진한 제2 롯데월드 사업을 화학 전문가인 기준 사장이 맡았을 때 좌천이란 말도 있었지만 롯데그룹의 한 임원은 “신 부회장이 그의 추진력을 믿었기 때문일 것”이라고 말했다.

신 회장은 제2 롯데월드를 세계적인 건물로 만들고자 한다. 그러나 14년 전과는 달리 112층 555m의 건물은 더 이상 세계 최고가 아니다. 이에 대해 롯데 측은 “높이는 같아도 층수라도 조절해 최고 층수의 건물을 만들 것”이라는 의지를 밝히기도 했다.

보수적이던 군의 태도 때문에 한때 신 부회장의 뜻이 물거품이 되는 것 아니냐는 관측이 많았다. 그러나 지금 군의 강경한 태도에 변화가 나타났다. 신 부회장에겐 지금 이 시간이 능력을 보여주기에 적합한 시기다.

신 부회장과 함께 『유통을 알면 나도 CEO』란 책을 쓴 연세대 오세조 교수는 신 부회장을 “글로벌 경영 감각을 지닌 사람”이라고 평한 바 있다.

신격호 회장은 요즘에도 정력적으로 부산 매장을 돌아 수행원을 기진맥진하게 만들 정도라 한다. 그러나 신 회장의 올해 나이는 86세다. 그래서 제2 롯데월드의 꿈은 아들인 신동빈 부회장에게 맡겨졌다.

신 부회장이 인정받는 경영자로 올라서기 위해서도 제2 롯데월드 건립은 꼭 필요하다. 세계 최고의 마천루를 신동빈 부회장이 설계하고 완성했다는 기록은 영원히 남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 이 같은 야망이 현실화하는 순간 그는 국내뿐 아니라 외국에서도 주목하는 CEO로 거듭날 수 있을 것이다.

임성은 기자
lsecon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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