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호세상보기>貧困의 정치,정치의 빈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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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예산안 심의를 끝낸 국회의원들이 여의도 의사당을 빠져 나오고있다.대부분 심드렁한 표정들이다.
『어이 金의원 같이 갑시다.뭐가 그리 바쁘쇼.』 『젠장,미국공무원처럼 정부 예산이 확정되지 않았다고 집에서 좀 놀 수는 없나.李의원은 요즘 「실탄」사정이 어떻소.』 『선거가 불과 다섯달 밖에 안남았는데 돈 주는 사람이 없어요.노태우(盧泰愚) 파동 때문에 자금줄이 꽉 막혔습니다.』 『기업들도 그렇지.기껏돈 줘놓고 나중에 처벌받는 짓을 누가 하겠소.중앙당도 다음달 사무요원들 봉급이나 줄 수 있을지 모르겠네.』 『옛날이 그립습니다.그때의 풍성한 얘기좀 할까요.94년 1월에 타계한 정일권(丁一權)전국회의장이 작고하기 얼마전부터 미국에서 산 것은 아시죠.그런데 이 양반이 92년 말 일시 귀국했을때 연희동 전통(全統)집을 방문했답니다.』 『그래서요.』 『이런 저런 얘기 끝에 당시 민자당 대통령 후보인 YS가 선거자금 문제로 고전한다는 얘기가 나왔답니다.그때 전통이 뭐라고 말했는지 아세요.「제가 87년 대선때 노태우에게 1,300억원을 주었어요.(만약丁의장께서)YS를 만나시거든 노태우가 재임중 5,000억원 정도 만들어 놓았을테니 절반인 2,500억원만 내놓으라고 말하라고 하세요」라고 했답니다.』(오병상 著 『청와대 비서실4』 85쪽) 『하여튼 전통은 그점에선 족집게야.3년 뒤 노통(盧統)의 눈물의 고백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지.「대통령으로 재임하던 5년동안 약 5,000억원의 통치자금이 조성됐습니다.주로 기업인들로부터 성금으로 받아 조성된 이 자금은 저의 책임아 래 대부분 정당운영비등 정치활동에 사용됐습니다」고 실토하지 않았나.
』 『그때의 반만큼 이라도 돈이 돌았으면 좋을텐데.』 ◇ 서울구치소의 철문이 열리고 전직 대통령이 탄 차를 집어삼켰다.두 회의론자(懷疑論者)가 깊은 한숨을 쉬며 TV 화면을 껐다.
『요즘 한국 정치의 중심인물은 누군지 아나.바로 대검 중수부장이야.그의 일문일답이야말로 이 어지러운 세상에서 매일의 나침반이지.』 『정(政)은 정(正)이라는 금언에 입각하면 그렇지.
노통이 받은 돈은 바로 뇌물(賂物)이라고 규정하지 않았나.』 『오늘을 한국인이 부패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날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뇌물이 흘러간 곳을 샅샅이 규명하지 못하는 한 힘들지.아울러 그 승리를 떨떠름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정치권에 득실대는 한 가망없지.지금도 혼돈을 만든 사람들이 그 혼돈을 제거하겠다고 설치고 있지 않나.』 『정치권은 게걸스럽게 돈을 먹는 정치풍토를 구조적으로 고칠 생각을 못해.1년에 100달러이상의 선물을 못받게 한 미국 의회의 윤리감각을 배웠으면 좋겠어.전직 대통령이 구속당하는 경천동지(驚天動地)의 사건을 당하고도 목전의 이해에 만 집착하지.』 『어두운 후에 빛이 오고 바람분 후에 잔잔한 법이니 기다려 볼 수밖에.』 『그런데 노통이 구속된 방이 4평도 못된다며.』 『소행으로 봐선 4평도 과분해.』 (수석 논설위원) 김성호 수석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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