얇은 주머니 털어 기금 ‘남몰래 장학금’ 28년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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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신우장학회 채상준 회장(왼쪽 네번째)과 이태희 회원(맨 오른쪽)이 포철공고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전달한 뒤 조성발 교장(왼쪽 두번째)과 함께 학생들을 격려했다. [포스코 제공]

지난 8일 포항 포철공고 교장실에서는 뜻깊은 장학금 전달식이 있었다. 신우장학회 회장을 맡고 있는 채상준(46·포스코 설비기술부)씨가 포철공고 강모(18·2년)군 등 2명에게 1년간 수업료 전액(1인당 98만원)을 각각 지급한 것이다.

강군 등은 여러 사유로 가정형편이 어렵지만 학업성적 등이 좋은 학생들이다. 채 회장은 이들에게 “가정형편 때문에 하고 싶은 공부를 마음 놓고 할 수 없는 것은 무엇보다 안타까운 일”이라며 열심히 공부할 것을 당부했다. 앞서 채 회장은 이달 초 포철공고 기숙사에서 강군 등을 만나 가정형편을 파악하는 등 학교 측과 장학금 지급을 의논했다.

채 회장이 속해 있는 신우장학회는 포스코 직원들이 운영하는 장학회다. 이 장학회가 무려 28년간 장학금을 지급해 온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그동안 남몰래 장학금을 전달해 왔기 때문이다.

장학회가 설립된 것은 1978년 3월. 포항제철소 설비기술부 손병락(50) 주임 등 설비기술부 동료 10명이 장학금 지급 만을 위해 만들었다. 회원들은 가정형편이 어려워 고교 졸업 뒤 곧바로 포스코에 취직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손씨는 “고교 시절을 어렵게 보낸 설비기술부 직원들이 ‘같은 처지의 중·고생을 돕자’며 장학회를 만들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회원들의 주머니 등을 털어 마련한 첫 기금은 당시 돈으로 2만3000원. 회원들은 기금을 더 모으기 위해 이 돈을 종자돈으로 해서 4년간 구내매점을 운영했다. 수시로 이동식 찻집, 일일호프, 크리스마스 카드 제작 판매 같은 모금 활동을 벌였다.

첫 장학금 지급은 장학회 설립 2년 만인 80년에 이루어졌다. 중학생 1명에게 1년치 학비를 지급한 것이다.

회원들은 81년 나름의 장학회 정관을 마련하고 매월 1만원씩 회비를 내고 모금 활동을 하는 등 기금을 늘려 나갔다.

회원들의 열성으로 차츰 기금이 늘어났다. 덕분에 그동안 한해도 거르지 않고 장학금을 지급할 수 있었다.

지금까지 전달한 장학금은 45명 2000여만원에 이른다. 요즘은 매년 2~4명의 학생에게 200만원 안팎의 1년치 수업료 등을 지급한다. 지급 대상은 학교장 추천을 받는다.

중·고교 졸업 뒤 대학에 진학하거나 사회에 진출한 장학금 수혜자들은 고마움을 표시한 뒤 “남을 돕는 사람이 되겠다”는 편지 등을 보내 오기도 한다.

30년이 지난 이 장학회의 기금은 1500여만원. 탈퇴·신규가입 회원이 일부 있지만 회원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이들은 장학기금을 낭비하지 않기 위해 모임을 서너달에 한번 정도로 제한하고 있다. 평생 장학회를 운영해 보자는 생각에서다.

채 회장은 “많은 학생들에게 혜택을 주지 못해 늘 안타깝지만 아름다운 전통을 오래 오래 이어 나가겠다”고 다짐했다. 

황선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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