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시론

민노당 국회 진입 실험무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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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대통령 탄핵안 가결로 촉발된 정치적 소용돌이와 후폭풍이 어느 정도 가라앉으면서 정치권과 언론의 관심은 탄핵정국이 가져온 정당지지율의 급변과 총선결과 예측에 집중되고 있다. 탄핵 이슈가 유권자들의 정당 선호에 엄청난 영향력을 미치고 있기 때문에 탄핵 찬반이 이번 총선의 핵심 쟁점이 되는 것은 불가피한 상황이지만, 총선의 쟁점이 탄핵 찬반 단일 이슈로 단순화해 버리고 총선의 다양한 쟁점과 의미가 간과되는 것은 우려스럽다.

탄핵정국의 와중에서 간과되고 있지만 이번 총선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쟁점의 하나가 이미 확실해지고 있는 민주노동당의 의회 진출이 한국 의회정치에 미칠 영향에 관한 것이다. 이번 총선에서 민노당이 의회 진출에 성공하게 되면 조봉암이 이끌던 진보당 이후 5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실현되지 않았던 진보정당의 제도권 진입이 실현된다는 점에서 그 정치사적 의미는 매우 크다.

민노당의 약진은 지난 지방선거와 대선에서 어느 정도 감지되었고, 최근 기존 정당들에 대한 국민의 불신이 커진 것도 지지율 상승에 도움이 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민노당의 의회 진출에 청신호가 켜진 결정적인 요인은 이번 총선에서 최초로 1인 2표제가 도입돼 정당투표의 전국득표율에 따라 비례대표 의석이 배분되기 때문이다. 최근 여론조사에서 민노당이 얻은 5% 내외의 정당지지도가 총선까지 유지될 경우 적게는 4~5명, 많게는 7~8석의 비례대표 의석을 민노당이 차지하게 될 전망이다. 또한 창원.울산 등의 지역구에서도 1~2석의 당선이 가능한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지지자들 사이에서는 민노당이 이번 총선에서 제2야당으로 등장할 것이라는 희망적인 기대도 나타나고 있다.

물론 이번 총선에서 민노당이 선전을 하더라도 의석수로만 보면 민노당은 소수 정당에 불과하다. 그러나 민노당의 의회 진출에 주목하는 이유는 진보정당의 의회 진입이 한국의 의회정치에 매우 의미있는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점 때문이다. 우선 민노당의 진입은 보수정당 일변도의 이념적 편향성을 극복하고 그동안 배제됐던 노동자.농민.서민들의 이익이 의회에서 상시적으로 대표된다는 점에서 의회정치의 지배적 담론과 게임의 규칙에 상당한 변화를 초래할 것으로 예상된다. 기존 보수 정당과 뚜렷하게 다른 정책선호를 가지고 있는 민노당 의원들이 의회정치에서 목소리를 높이게 되면, 지금까지 한국 의회에서 보지 못했던 노선 대결과 정책 논쟁이 빈번하게 나타날 것으로 예상된다. 다소 희망적인 기대를 하자면 민노당의 의회 진입이 기존 정당에는 새로운 도전이 되겠지만, 이러한 도전을 통해 보수정당들이 취약한 이념적 정체성을 확립하고 정책과 노선의 차별화를 통해 건전한 보수정당으로 거듭나는 촉매제가 되기 바란다. 또한 진성당원의 비율이 높고 당내 민주화가 가장 앞서 있는 민노당의 등장은 기존 정당의 민주화에도 큰 자극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

물론 급진적 성향을 가진 민노당의 의회 진입을 계기로 한국사회에서 좌파의 목소리가 커지고 이념갈등이 더욱 확대될 것을 우려하는 시각도 적지 않다. 또한 좌우 이념대결이 첨예화해 의회정치가 표류할 것을 걱정하는 목소리도 들린다. 그러나 민노당이 기존 보수정당을 위협할 정도의 세력으로 성장할 가능성은 당분간은 크지 않기 때문에 좌파 영향력의 확대라는 우려는 과장된 것이라는 느낌이다. 오히려 민노당은 한국사회에 이미 존재하는 계층적.이념적 갈등을 제도정치의 틀로 끌어들인다는 점에서 오히려 사회통합과 갈등관리에 도움이 된다고 판단된다. 진보정당인 민노당의 의회 진출로 인해 17대 국회는 새로운 정치실험의 무대가 될 전망이다. 새로운 실험이 취약한 한국 의회정치의 도약을 위해 긍정적으로 기여할 수 있을지 앞으로 관심을 가지고 지켜볼 일이다.

이내영 고려대 교수.정치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