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자전극 '길' 출연 배우 백성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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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극인생 60년을 무대에 올리는 백성희씨. 오른쪽은 작품마다 주연으로 발탁됐던 30대 시절 모습.

원로 연극배우 백성희(79)는 '살아있는 역사'다. 1972년 마흔일곱살 때 국립극단장을 처음 맡았다. 당시 언론들은 "전 세계를 통틀어 최연소 여성 국립극단장"이라며 웅성거렸다. 91년에도 국립극단장을 맡았다. 연기를 시작한 지 벌써 60년째. 지금껏 출연한 작품만 400편이 넘는다. 백씨는 "나는 인생에서 연극이란 외길을 걸었고, 국립극단이란 외길 속의 외길을 또 걸었다"고 말한다.

'사는 것이 드라마'였던 그의 삶이 연극으로 되살아난다. 다음달 14~18일 문예진흥원 예술극장 대극장에서 '배우 백성희 자전극-길'이 올라간다. 국립극단 이윤택 예술감독이 직접 인터뷰해 대본을 썼고, 재미 연극인 김혜련씨가 연출을 맡는다. 이감독은 "이젠 백성희 선생님의 연극 인생을 돌아볼 때가 됐다"며 "국내에서 처음으로 '메타극'을 선보일 것"이라고 말했다. 무대에 오른 배우의 인생과 연극의 경계를 허무는 메타극은 유럽에선 종종 시도되는 양식이다.

*** 19살 데뷔 후 400여편 출연

사실 이번 작품의 제목에는 '연기 인생 60년'이란 수식어를 달려고 했다. 그런데 백씨가 한사코 반대했다. "거추장스러운 겉치레처럼 보인다"며 "'행사'가 아니라 속이 알찬 연극을 한 편 올리자"는 지적이었다. 백씨는 "이왕 자리가 마련됐으니 내 모든 것을 불태우겠다"고 밝혔다. 말 그대로 백씨는 가슴 아픈 개인사까지 작품 속에 톡톡 털어넣었다.

소학교(초등학교) 시절이었다. 백씨는 외삼촌에게서 난생 처음 보는 책자를 하나 받았다. 연극 팸플릿이었다. 일본어가 적혀 있었고, 표지에는 남자 아이의 사진이 있었다. 백씨가 "이 남자애, 너무 멋있다"고 하자 "남자가 아니라 여자애"라는 외삼촌의 대답이 돌아왔다. 백씨는 그제서야 '여자도 연극을 할 수 있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그럼 나도 할 수 있겠네'란 마음이 들었다.

팸플릿의 기억은 좀체 지워지지 않았다. 백씨는 "흰 종이 위에 떨어진 먹물 한 방울이 시간이 지날수록 번지듯이, 연극에 대한 생각도 나이를 먹으며 함께 자랐다"고 말했다. 열여덟살 때였다. 해방되기 2년 전, 동덕여고(5년제) 4학년이던 백씨는 부모 몰래 '빅타'가극단을 찾아갔다. 그리고 오디션을 통과했다. 그때부터 백씨의 연극 인생은 막을 올렸다.

그는 '이화자'라는 일본식 가명을 썼다. 행여라도 집에서 알까봐 겁이 났다. 그런데 첫 지방 순회 공연을 준비하다 그만 들키고 말았다. 아버지는 노발대발했다. 가극단까지 찾아와 가방을 숨겨 버렸다. "딴따라를 할거면 죽여버린다"고 으름장도 놓았다. 백씨도 지지 않았다. 결국 아버지는 "너 하고 싶은 걸 해라. 대신 너는 내 딸이 아니다"라며 손을 들었다.

*** "내 삶이 연극인지 헷갈려"

백씨는 "생각하면 두고두고 한(恨)이 된다"고 말했다. 요즘만 해도 웬만한 대학의 연극영화과 입학 경쟁률은 수십 대 일이다. 백씨는 "얼마 전 입학시험 심사 때문에 어느 대학교를 갔다가 교문에서 기도하는 부모를 봤다"며 "집에서 밀어주는 풍경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고 말했다. 거칠었던 시대에 대한 아쉬움이었다.

백씨는 가극단에서도 두각을 나타냈다. 미모와 재능을 겸비한 그였다. 결국 가극이 아닌 순수연극을 하던 현대 극단에 캐스팅됐다. 그리고 44년, 열아홉살 때 '봉선화'(함세덕 작.연출)에서 공식적인 데뷔를 했다. 그때 극장주이던 유치진의 눈에 띄었다. 그 인연으로 백씨는 국립극장 창립 멤버가 됐다. "한국전쟁 때는 피란지인 대구에서도 공연을 올렸어. 수㎞ 밖에서 포성이 꽝꽝 울리는 데도 객석은 꽉 찼지."

백씨는 승승장구했다. 올리는 작품마다 주연에 발탁됐다. "어쩌다 단역을 맡으면 '이제 좀 쉬겠구나'라고 생각할 정도였지. 그러다 배역을 주연으로 다시 바꾸면 '차라리 사표를 내겠다'고 난리를 칠 정도였으니까." 40대 초반에는 연극 '달집'에서 70대 노파를 연기했고, 50대 후반에는 '장화 신은 고양이'에서 18세 소녀를 완벽하게 연기했다. '작품은 가려도 배역은 가리지 않는다'는 게 그의 연기 철학이었다.

백씨는 지난 25일 기자와 만나 "이제는 연극이 나인지, 내가 연극인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이번 공연에서 그가 읊조리는 대사와도 흡사하다. "나는 이 길을 왔어. 다른 어떤 길도 아닌 배우의 길을. 내게 주어진 유일한 이 길을 죽을 때까지 가는 거야. 그것이 비극인지 희극인지 평생 모르는 체 말이야…." 그 길은 지금도 계속된다.

백성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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