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담>국가정보학술회 참석 美.러 前정보거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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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미국과 옛소련 정보기관의 전.현직 고위관리가 서울에서 만났다.지난 92년 불가리아 수도 소피아에서 열린 한 국제회의에서 처음 만났던 이들은 3년6개월만인 지난13일 서울에서 있은 국가정보 국제학술 세미나에 참석,미정보기관의 북핵관 련 정보가 과장됐었다고 실토했다.본사는 전.현직 고위정보관리들이 한반도 상황에 관한 신선한 시각을 제시할 것으로 판단,긴급좌담회를 가졌다.이 자리에서 윌리엄 콜비 전 미중앙정보국 (CIA)국장은북한핵개발에 대한 옛소련의 책임을 강 조했다.반면에 바딤 키르피첸코 러시아 해외정보부 자문위원장 (전 옛소련 국가보안위원회(KGB)부의장)은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를 설립.운영하는 과정에서 미국이 러시아를 무시한 까닭에 북핵문제 해결에 적극적 역할을 할 수 없었 다고 강변했다.북한사정과 관련,김정일(金正日)의 권력승계지연이 북한 지도부내에 「김정일수령 불가피론」과 「김정일 무능론」이 병존하기 때문이라는 콜비국장의 지적도 흥미를 끈다.본사 길정우(吉炡宇)국제정치전문위원의 사회로두 시간동안 진행된 좌담을 소개한다.
[편집자註] 길=CIA와 KGB의 대결로 상징되기도 했던 냉전시대 미국과 옛소련 두 초강대국의 정보책임자로 일하신 두분을모시고 대화를 나누게 돼 감회가 새롭습니다.냉전시대의 종식은 미국과 러시아가 상대방으로부터 위협에서 벗어났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가이익에 대한 포괄적 위협을 감지하는 정보기관의 역할은 여전히 중요합니다.현재 미국과 러시아가 상정하는 위협은 어떠한 것이 있습니까.
콜비=정보기관 본연의 역할은 현 시점까지 탐지해내지 못한 위협을 밝혀내는 것입니다.탈냉전시대에도 국가이익에 대한 위협요소는 항상 어딘가에 존재하기 때문입니다.오늘날에는 테러리즘과 마약의 위협에 전세계가 노출돼 있습니다.
키르피첸코=냉전시대에는 「잠재적 적대국」과 「노골적인 적국」을 분류하는데 골몰했습니다.그런데 오늘날의 정보업무에서는 「적」이란 개념을 찾아볼 수 없게 됐습니다.우리는 중국과 북한을 포함해서 대부분의 나라와 정상적인 관계를 유지하■ 있기 때문입니다. 전반적으로 경계해야할 대상이라면 콜비국장이 말한대로 테러행위와 마약거래를 일삼는 국제폭력조직을 들 수 있겠죠.러시아는 현재 남부국경지역의 이슬람계 공화국인 타지키스탄과 아프가니스탄 등을 주시하고 있습니다.
길=한국의 정보기관에는 북한이란 명확한 위협요소가 주분석대상이 됩니다.북한과 같이 폐쇄된 국가에 대한 정보활동은 상대방의군사적 역량 분석에 치중되는 경향이 있습니다.그러다 보면 균형된 사태파악에 문제가 야기되기도 할텐데 미.러 양국이 판단하는북한 핵개발 능력에 대해 듣고 싶습니다.
키르피첸코=핵과 관련해서 북한의 실질적인 위협은 없다는게 제개인적인 견해입니다.북한의 핵개발 수준은 인도.파키스탄 및 과거 남아프리카공화국보다 떨어진다고 보기 때문이죠.이 문제에 대해서는 미국과 일본이 보다 자세한 정보를 갖고 있을 겁니다.
콜비=미신고시설에 들어가 보지 않고서는 북한의 핵개발능력을 판단할 수 없습니다.북한의 핵위협이 없다는 키르피첸코위원장의 말은 현재 실질적 위협이 되지않는다는 뜻으로 받아들이고 싶군요.북한에 대한 핵확산에 옛소련의 책임을 부정할 수 는 없습니다. 길=대북협상이 진행되면서 북한의 핵개발 수준에 대한 미 정보기관의 평가가 애초에 다소 과장됐다는 말씀입니까.정치적 이유로 왜곡됐던 것은 아닙니까.
콜비=북한은 지구상에서 가장 위험스런 집단이라는 게 제 개인적 생각입니다.이란이나 이라크보다도 위험한 존재입니다.북한핵개발 현황에 대한 CIA국장의 의회증언이 시간이 흐름에 따라 달라진 것은 오히려 정보기관의 솔직한 판단을 보여주 는 태도라고봅니다.그동안 축적된 정보와 대북협상과정에서 확인된 결과를 반영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길=북한핵문제 해결과정에서 북-미 기본합의문이 체결되고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가 구성됐습니다.KEDO 활동에 많은나라들의 참여를 촉구하고 있지만 정녕 러시아는 소극적 태도를 보이고 있습니다.
키르피첸코=북한핵문제 해결은 미국과 일본이 명확한 책임을 지고있고 중국과 러시아는 참관인 역할을 할 뿐입니다.러시아는 보다 적극적인 활동을 제의받지 못했다는 것이 정확한 표현일 것입니다. 콜비=러시아는 아직도 강대국으로서 자부심을 갖고있기 때문에 두번째 자리는 결코 원하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KEDO는 미국과 일본이 주도하는 성격이 강하기 때문에 러시아는 참가하고 싶지 않을 겁니다.
키르피첸코=미.일이 참가한다고 해서 러시아가 반드시 동참해야한다는 논리는 적절치 않습니다.
길=그러면 왜 러시아형 경수로공급을 적극 제안했었습니까.
키르피첸코=그건 이미 지나간 일입니다.러시아의 경제사정은 매우 어렵고,우리가 세계의 모든 일에 일일이 간여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길=현재 한국에선 북한 김정일(金正日)과 체제의 장래에 대한논의가 한창입니다.두분의 경험에 비추어 김정일정권과 북한체제의장래를 예측해 주시고 한국이 대북한관계에서 유의할 사항을 짚어주시지요.
콜비=김정일이 현재 실권을 행사하고 있는 것으로는 보지 않습니다.북한의 당.정.군등 권력의 핵심세력들은 어리석고 무책임한김정일이 단지 김일성(金日成)의 아들이고 그들로서도 현시점에서체제의 정통성 유지를 위해 필요하다는 판단에서 받들고 있는 것이라고 봅니다.그들은 김정일이 사고라도 칠까봐 아무 것도 못하게 하고 심지어는 연설조차 막고 있습니다.
최근 북한군부내 인사가 있었다고 들었습니다.권력재편이 시작되고 있는 것이지요.승계과정에서 김정일은 서서히 사라져 갈 것입니다.아무리 폐쇄된 사회라해도 지도력있는 사람이 지도자가 되게마련이기 때문이죠.이건 어디까지나 제 견해일 뿐 비밀정보에 근거한 것은 아닙니다.
김정일이 사라진다고 해도 북한에는 새로운 지도자가 등장해 한동안 체제가 존속될 것입니다.한국.미국.일본 등 외부로부터의 정보유입이 북한을 점차 변화시킬 것입니다.이같은 점진적 방식이모두에게 바람직합니다.
***점진적으로 北 변화해야 키르피첸코=어느 나라든 정부 수반은 전체 국민들에 의해 선출돼야 합니다.지금 세계 대부분의 국가들은 이 방식에 의해 지도자를 선택하고 있습니다.오늘날의 북한은 20세기초 러시아의 차르왕조를 연상시킵니다.후계자가 우둔하고 약할 경우 곧 교체되는 것이 정치죠.
길=민주화와 국가정보 관리를 논할 때 우선적으로 걸리는 부분이 국가정보를 다루는 언론의 태도입니다.미국언론의 폭로성 기사보도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국가보안과 관련된 보도에 대해 미국정부의 특별한 조치나 배려가 있습니까.또 러시아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콜비=미국에서는 언론의 자유가 수정헌법 첫머리에 보장되어 있습니다.국가안보에 심대한 영향을 줄 경우에만 보도를 통제할 수 있습니다.
길=그러나 중요한 정보가 새어나가 끝내 보도될 경우 취할 수있는 조치는 한계가 있지요.
콜비=그렇습니다.물론 출처를 색출해서 처벌해야 합니다.그렇지만 언론을 상대로 한 법적 대응은 매우 힘듭니다.보도내용이 사실과 다르다는 것과 보도의도에 악의가 개재돼 있다는 점을 입증해야 처벌이 가능한데 어떻게 그걸 증명해 냅니까.
현실적으로 언론에 대해서는 가급적 소송을 제기하지 않습니다.
전직요원들에게도 CIA에 입사할 때 서명한 비밀준수서약이 그대로 적용됩니다.정보에 관한 글을 쓰거나 회고록을 발간할 때면 미리 CIA에 원고를 보내 보안검열을 받아야 합니 다.
이 규칙을 어기면 책자발간으로 얻은 수익은 법에 의해 전액 회수됩니다(콜비국장은 이번 회의에서 자신이 발표한 논문에 대한CIA출판심의위원회의 사전승인 공문을 보여줬다).
키르피첸코=모든 정보요원들은 비밀을 준수하겠다는 선서를 하지만 제대로 지켜지지 않고 있습니다.보도돼서는 안될 사항도 신문지상에 오르내립니다.여기에 대해선 속수무책일 뿐입니다.지난 71년간 엄격히 시행돼 온 언론통제에 대한 반발심리 가 작용해서인지 비밀사항을 보도하는 것이 영웅시되기까지 하는 형편입니다.
길=장시간 감사합니다.
윌리엄 콜비〈전 CIA국장〉 바딤 키르파젠코〈전 KGB 부의장〉 사회=길정우 국제정치전문위원 정리=김용호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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