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포럼>그동안 많이 움츠려 왔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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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앙드레 모루아가 저술한『영국사』에는 장미전쟁의 종결과 함께 헨리 7세가 등극하면서 중세시대가 막을 닫고 튜더 왕조가 시작되는 장면에서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중대한 사건이 일어났을 때에 그에 관련되는 목격자가 그 사건의 중요 성을 모르고지나치는 수가 많다.보스워스 필드의 전투가 끝난후 스탠리경이 자기의 의붓 아들 헨리 튜더(헨리 7세)에게 왕관을 씌우는 것을 목격한 병사들은 이것 역시 끊임없이 계속되는 전쟁에서 볼 수 있는 하나의 희화적 사건으로만 간 단히 보고 넘겼을지도 모르지만 그들은 한 사회조직의 종말에 관한 증인이 되고 있었던 것이다.」 현대그룹 정세영(鄭世永)회장이 지난 25일 터키 승용차 합작공장 기공식에 즈음하여 이스탄불에서 발표한 이 그룹의「2000년대 세계화 전략」과 거기 곁들인 기자회견 관련 기사를 읽으면서 나는 앞에 인용한「보스워스 전장의 대관식」장면 을연상했다.이 기사를 읽음으로써 우리는 지금 한국에서 진행되고 있는「東아시아적 정치 우위시대의 幕내리기」실황 장면에 관한 증인이 되어 있는지도 모른다.그 자리에서 정세영씨는 말했다.
『현대는 그동안 많이 움츠려 왔고 따라서 밖에 나갈 생각을 하지 못했다… 이제(현대)그룹이 정서적으로 안정된 만큼 자동차.전자부문은 해외투자를 할 계획이다.』 이 말에서「많이 움츠려왔다」는 것은 현대그룹,그리고 모든 한국의 대기업이「꼬투리」만잡히면 정권과 정치적 편견 인텔렉추얼로부터 당해야 했던 박해와속박을 완곡하게 말한 것임을 모를 사람은 적을 것이다.「정서적안정」이란 말은 이 그룹이 최근에 정권으로부터 받은「용서」의 제스처를 지칭했을 것이다.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이러한 완곡어법이나 말의 내용이 아니다.이런 말을 할 수 있었음과,또는 반드시 해 두어야겠다고 생각했음이 더 중요하다고 본다.이것은 최근 유 형 무형으로 대기업이 표출하고 있는 일련의 의도적「자유기업선언」가운데 하나였다고 나는 생각한다.
냉전이 끝난 다음도 국경.군대.관료.외국어.민족.종교.생물적유전(遺傳)….이런 것은 다 그대로 있다.다만 이들이 연주하는불협화음으로 넘치는 오케스트라의 음향위로 경제라고 불리는 예전부터 있던 고음 바이올린 파트의 멜로디가 솟아 올라와 이 음악을 매기는 중심이 됐다는 것만 달라진 점이다.『명심보감(明心寶鑑)』에 맹자의 이런 말이 있다.「천명에 순응하는 자는 생존할것이고 천명을 거스르는 자는 패망할 것이다(順天者存,逆天者亡)」. 기업은 소비자를 위한 머슴이다.그리고 현대적 직종을 가진많은 사람들의 일터다.대기업은 소비자를 위한 상머슴이다.더 크고 더 안심되는 일터다.국제적으로는 다른 나라 기업과 한판 승부 시합을 벌이고 있는 국가대표선수다.
그들이 정경유착을 위해 돈을 냈다고 하면 그돈은 정치-관료 권력이 본래는 출입이 자유로웠어야 할 시장에의 진입을 막고 서있는 것에 대해 통행세 명목으로 가외로 억울하게 지불한 비용이다.그들이 여러 업종에 들어서 있는 것을 나무라는 것도 그르다.거래비용이 비싸면(우리나라에서는 주로 정부의 과잉규제 때문에)기업은 대규모.다업종으로 돼야 비용이 싸진다는 사실은 91년노벨경제학상을 탄 로널드 코스교수의 혁명적 분석결과와 일치한다. 대기업의 문제는 도덕의 문제가 아니라 진화론적 문제다.자유시장에서 대기업이 비용과다 때문에 살아날 수 없게 되면 자연의선택(자연 도태)을 통해 스스로 적응하든지 아니면 멸종된다.대기업을 결과적으로 비난할 수 있는 이유는 딱 하나 ,독점의 폐해다.그러나 경제의 국경없는 세계화에 따라 수입은 활짝 개방됐다.적어도 우리나라 민영 기업에는 독점의 여지는 전적으로 사라졌다. 기업의 대규모화는 지금 세계적 유행 추세다.우리 국적의대기업은 다른 나라 다국적 대기업과 경쟁하는 용사로서 갈채를 받아 마땅하다.용병 아닌 국민군이다.은행돈을 못갚고 쓰러진 기업은 예금주와 발권기관에 해악을 끼쳤지만 좋은 물건 만들어 팔아 은행에 빌린 돈 잘 갚아가며 외국과 경쟁해 이겨 수출과 고용을 확대하고 있는,현재 살아 번창하는 대기업은 효자.열녀.충신이다.대기업을 때리는 것은 권력차원에서는 정세영씨의 말대로「규제를 만든 사람들은 규제가 없어지면 갈 데가 없기때문」일 것이고 인텔렉추얼 차원에서는 계급적 편견 아닌 계급 이데올로기적편견의 남은 그림자 때문이 아닐까.기업이란 이름의 머슴을 때려서는 안된다.
고임금에 대처해서는 비숙련 노동자를 데리고 올 것이 아니라 노동력이 싼 곳으로 공장을 들고 나가는 것이 옳다.시장과 기술을 찾아서도 공장은 자유롭게 해외로 나갈 수 있어야 한다.고금리에 대처해서는 싼 외국자본을 맘대로 들고 들어올 수 있게 하는 것이 옳다.『우리 입장으로는 싼 외국 금리로 투자비를 조달하는 것이 경쟁력을 높일 수 있다… 현대의 자동차 투자는(터키다음엔)인도네시아,그 다음엔 인도로 간다.그 다음엔 영국으로 간다.』이것이 정세영회장의 2000년대 전략이다.다른 대기업도이런 해외전략으로 나가야 할 것이다.
〈논설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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