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민등록번호의 수난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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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호 30면

며칠 전 A신용카드 회사에 ‘1588’로 시작하는 전국 대표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이 회사 직원 B씨의 연락처를 안내받기 위해서였다. 알다시피 대표번호를 통하면 ARS라는 기계음과 ‘지루한 버튼 대화’를 견뎌야 한다.

“회원은 1번, 비회원은 2번….” 비회원 코드를 누르고 상담원을 기다리고 있는데 주민등록번호를 눌러달라는 것 아닌가? 단순히 전화 안내를 바라는 비회원에게 주민번호라니. 직원 B씨에게 이유를 묻자 “모르겠다”고 했다. 다시 B씨에게 회원 정보 관리 실태에 대해 묻는다. 탈회 회원 정보는 어떻게 관리하는지, 개인정보 폐기는 완벽하게 하는지 등등. 그러나 이미 김이 샜다. 대뜸 ‘주민번호부터 묻는 회사’의 대답이 미더울 리 없다.

이번엔 C은행에 똑같은 질문을 했다. 신용카드·보험 등 이 은행 계열 금융회사에 개인정보를 제공하는 이유를 묻자 금융지주회사법에서 허용하고 있는 내용이라고 대답했다. 거래 신청을 할 때 고객으로부터 정보 활용에 대한 승인을 받는다고 덧붙였다. 효과적인 개인 신용관리를 위한 통합운용이라면 이해하겠지만 계열사 영업에 공공연히 활용하면서도 ‘문제가 없다’는 태도다.

옥션 사태, 하나로텔레콤 사건에서 불거진 개인정보 유출 문제로 온 나라가 들끓고 있다. 이들 말고도 텔레마케팅·신용카드·인터넷 기업 등 고객 정보가 ‘재산’인 회사들로서는 남의 얘기 같지 않을 것이다. 안팎으로 단속도 꼼꼼히 하고 있을 법하다. 그러나 A사 사례처럼 버젓이 주민번호를 캐묻고 있는 것이 실상이다. 조그만 의원 처방전에서도, 대형마트 경품 추첨 매대에서도 주민번호가 떠돌아다니고 있다.

24일 정부는 개인정보 침해 방지 대책을 내놓았다. 주민번호 대체수단인 ‘아이핀(i-PIN)’을 활용하도록 하고, 주민번호·은행계좌 등은 반드시 암호화해 저장토록 한다는 게 주요 내용이다. 정보보호 의무를 위반하는 업체에 대한 법적 제재도 강화한다고 한다.

하지만 모든 규제에는 틈이 있게 마련이다. 피해를 방지하기 위해선 소비자 스스로도 적극 나서야 한다. 최소한 기계음이 주민번호부터 묻는 데는 거부 의사를 분명히 하고, 그런 회사에 대해서는 엄중히 책임을 묻는 힘을 보여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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