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살때 한국인이란 사실 알고 비밀 생겨 멋지다고 생각했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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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처음엔 감이 전혀 안 왔어요. 그냥, 내가 한국 사람이구나…. 오히려 비밀이 생긴 것 같아서 재미있었어요.”

자신이 일본인인 줄만 알았던 열 살 소녀는 ‘출생의 비밀’을 알고는 되레 신이 났다. 일본인 친구에게 자랑 삼아 비밀을 털어놓자 “와, 멋지다! 빠스뽀또(여권) 있는 거야? 외국어도 할 수 있어?”라며 부러움 섞인 환호가 터져 나왔다.

‘차별과 멸시, 따돌림 속에 꿋꿋하게 살아가는’ 재일교포의 모습을 생각했다면 만화가 정구미(28·사진)씨의 얘기가 낯설지도 모른다. 재일교포 2세인 아버지와 경상도에서 일본으로 시집 간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정씨는 교토에서 나고 자랐다. 일본에서 대학(교토사가예술대학 일본화 전공)을 마치고 “한국어가 배우고 싶어서” 2000년 혼자 한국에 건너왔다. 홍익대 시각디자인학과를 졸업하고 얼마 전 한국에서 만난 남자친구와 결혼도 했다.

2004년부터 홈페이지 ‘구미닷넷(http://koomi.net)’을 운영하며 한국 생활과 한·일 양국에 걸친 ‘두 개의 마음’을 만화로 그리고 있는 만화가다. 최근엔 건담으로 유명한 일본의 세계적 캐릭터 기업 반다이에 입사 시험을 치른 경험을 바탕으로『노란구미의 돈까스 취업』(거북이북스)이란 책을 펴냈다.

대학 시절 한국말로 대학 수업을 따라가기 어려워 “일본어 초급·중급 과목을 듣고 A학점을 받았다”는 그는 재일교포에 대해 우리가 가진 편견을 바로잡고 싶어했다.

“재일교포가 한국인이라서 차별당한다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아요. 동생이 따돌림을 당했지만 한국인이라서가 아니라 나쁜 사람을 만났을 뿐이에요. 일본에 사는 한국 사람들의 상황은 다 달라요.”

한국 생활 9년째, 이제는 한·일 어느 쪽도 아니라는 정체성 고민을 털고 양쪽에 모두 속한 ‘중간자’라고 말할 수 있게 됐다. 하지만 민족학교에서 중학교 과정을 배운 청소년기가 혼란 없이 지나갔을 수는 없었다.

역사는 ‘원자폭탄이 떨어지고 전쟁 끝났으니 평화롭게 살자’가 전부이다시피했던 일본 학교의 교육 내용과 달랐다. 경주 수학여행에서 한국 학생들로부터 ‘반(半)쪽발이’ 소리를 듣고는 마음이 복잡했다. 고등학교를 마치고는 무작정 한국으로 가버리려고도 했다. 그럴 때면 엄마는 “일본놈 싫어!”라는 딸을 달랬고, 할머니는 “대학 다니며 일본 사회를 배우는 게 필요하다”고 토닥였다.

약간 특별한 성장통 끝에 그는 보통의 3세들과는 다른 정체성을 찾았다.

“사실은 3세지만 엄마한테 한국을 배웠잖아요. 그래서 0.5를 올려 2.5세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부모님이 둘 다 교포인 3세들은 그냥 일본인이나 마찬거지거든요. 물론 이 사람들도 한국인이니까 문화를 지키고 싶겠지만 현실적으로 10년, 20년 지나면 어려울 거예요.”

그러다 보니 “일본이 싫다”면서도 일본 이름으로 택시운전을 하는 아버지의 현실도 이해하게 됐다.

“일본에서는 개인택시에 운전기사의 이름을 적어요. 아버지가 원래 일본 이름을 썼는데 제가 한국으로 온 다음에 한국 이름 ‘정화언 택시’로 바꿨어요. 얼마 뒤 다시 일본 이름으로 돌아갔지만, 잠시나마 마음에 맺힌 한을 풀었으니 충분했대요. 일본에서 일하려면 아무래도 일본 이름이 편하실 거예요.”

하고 싶은 얘기가 많아 계속 만화를 그린다는 그가 최종적으로 말하고 싶은 건 무얼까.

“전 일본에 지진이 나면 슬프고, 한국에 좋은 일이 있으면 기쁘거든요. 마음이 두 개예요. 그런데 한국은 아직까지 단일민족이 너무 중요하니까… 그걸 깨고 싶어요.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아직은 마음에 남아 있는 것 같아요.”

새로 연재하는 만화의 주인공은 한국인도, 교포도 아닌 일본인이다. 한국·일본 어느 편인지 따지지 말고 양국에 걸친 마음을 글로벌 시대에 맞게 봐 달라는 그의 바람이 일본인 만화 주인공에서 읽혔다.

글·사진=홍주희 기자

정구미씨의 만화 캐릭터 ‘노란구미’와 자신의 이름에 얽힌 에피소드를 그린 네 컷 만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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