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름의 역사] 26. 대비극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7면

▶ 1993년 다방에서 만난 정순택(右)씨와 필자.

정순택(鄭舜澤). 삼청동 꼭대기에 살고 있었다. 처자를 데리고 북으로 넘어갔을 때는 신문에 대문짝만하게 났다. 그가 이번에 내려왔을까. 또 그의 어머니가 아직도 그집에 살고 계실까. 두려움을 무릅쓰고 대문을 흔들었다. 서너번만에 "누구세요?"하며 대문쪽으로 나오는 소리가 들렸다. 순택이 어머니 목소리가 틀림없다.

"누구세요?"

"저 순택이 친구 한운삽니다."

"뭐?" 문을 열면서 그는 나를 끌어들였다.

"아니 이게 웬일이여? 어서 들어와요."

전깃불 밑에서 나를 자세히 보시더니 "웬 땀을 이렇게 많이 흘려?"

"혹시 순택이가 내려왔나 해서 와봤습니다."

"왔어."

"왔어요? 어디 있습니까?"

"저 아래 동리에…."

"저 좀 만나게 해주세요!"

어머니는 내 손을 잡으셨다.

"청주상업을 같이 다녀. 일본 학병에 같이 끌려가. 서울대도 같이 다녀… 내가 얼마나 애간장을 태웠는데…."

"예, 우린 모두 부모님들 애간장만 태우게 한 못된 놈들이었습니다."

순택이가 있는 집 위치를 듣고 나는 즉시 자리를 떴다. 어둠이 깔리기 시작했다. 인민군이 어디 서 있지 않나 조심조심. 마치 공포영화 주인공처럼 재동으로 빠져나갔다. 커다란 기와집이라고 했다. 대문이 열려 있다. 조심스럽게 들어서니 대청마루에 서 있던 친구가 "야, 너 누구야?"

나는 밀짚모자를 벗고 손을 내밀었다.

"이 자식! 살아있었구나!" 덥석 내손을 잡고 대청으로 끌어올렸다.

"의용군에 끌려가다 도망쳤다."

"뭐 니가? 아니 총대 하나도 제대로 못 메는 주제에 의용군은 무슨 놈의 의용군. 오랜만에 술이나 한잔 하자. 여기 중국집이 있어."

대범하다. 밖에서는 지금 인민군.인민위원회 아니면 기도 못 펴는데 너는 역시 통이 크구나. 그러니까 수억의 돈을 남로당에 넘겨주고 처자와 함께 휘익 북으로 갔었구나.

"애가 많이 컸지?"

그는 "허허… "하며 크게 웃었다.

"여기서 갈 때 말이야. 신발을 덮을 정도로 긴 바지였거든. 지금은 그게 무릎까지 올라갔어."

그의 눈빛에 많은 이야기가 담겨 있는 것을 내 어찌 모르겠는가.

"여길 어떡할 작정인가?"

"바꿔야지. 갈아치워야지. 특권을 누리는 자가 몇 명이나 되겠어. 인민이 다 똑같이 살아보자는 거야."

"여기 내려온 사람들. 처음엔 인상이 좋았다고 그랬는데 이젠 무서워졌다고 그러거든."

"미국놈들만 쫓아내면 우리끼리 좋은 세상 만들 수 있어. 지금 낙동강에서 버티고 있는데 시간문제다. 대구.부산 얼마 안 남았어. 두고봐!"

자신만만한 이 친구의 얼굴을 나는 차분히 음미해보았다. 믿음직스럽기도 하고 불안하기도 했다.

"너 신분증이 필요할 거야."

서랍에서 도장을 꺼내더니 쾅 찍어주었다. "고철 수집원이다."

한운사 작가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