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거 쇼야, 쇼 아니야…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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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호 09면

한때는 ‘리얼 버라이어티’의 ‘리얼함’에 목숨 걸었던 적이 있다. ‘몰래카메라’ ‘무한도전’ ‘1박2일’ ‘라인업’ 등을 놓고 카메라 속에서 벌어지는 해프닝의 진위에 침 튀기며 논쟁을 벌이곤 했던 것이 이들 프로그램에 보이는 네티즌의 익숙한 풍경이었다. 그때는 그 카메라 속 사람들의 땀과 당황스러움과 눈물이 진짜였는지가 정말로 중요했다.

이윤정의 TV 뒤집기

시절이 변해서일까. 리얼 버라이어티의 ‘리얼’에 뻔뻔히 가위표를 긋고는 그래도 여전히 리얼리티 프로임을 내세우는 ‘우리 결혼했어요’를 보고 있으면 진짜에 목숨 걸었던 그때가 머쓱하게 느껴진다. 아무런 관련이 없는 연예인들을 짝지어 놓고 단지 2주에 하루 만나 결혼 생활을 흉내 내도록 만든다.

잠옷을 입었지만 잠을 자는 것은 아니며, 그것도 한 시간씩 정도만 자는 척한다. 한마디로 옛날 애들 식 소꿉장난을 시켜놓고 그걸 지켜보는 거다. 그러면서 진짜 리얼리티 쇼처럼 ‘뒷담화’ 독백이 펼쳐진다. 상황은 가짜지만 그 속의 연기는 진짜다.

그런데 이 애매한 리얼 버라이어티쇼가 일으키는 재미가 만만찮다. 아니, 돋보이는 건 재미의 크기보다 재미의 새로움이다. 생각해 보라. 만약 진짜 부부 네 쌍의 집에 카메라를 들여놓고 실생활을 들여다보는 진짜 리얼리티 몰래카메라 쇼였다면, 혹은 이 네 쌍의 커플이 주인공인 웨딩 ‘시트콤’이었다면 지금 같은 재미가 느껴졌을까.

반드시 진짜일 필요는 없지만, 그렇다고 꼭 진짜가 아니라고도 할 수 없는 이 복잡한 리얼리티 쇼에 보이는 시청자들의 반응 또한 복잡미묘하다. ‘진짜’ 리얼리티 쇼에서 시청자는 그들이 리얼한 땀을 많이 흘릴수록 감동하고, 어리석게 속아 넘어갈수록 통쾌해하고, 혹시라도 진짜가 아닌 듯해 보이면 비난하고, 그러면 됐다.

이제 그 진짜의 벽을 스스로 허물어버린 ‘우리 결혼했어요’를 보면서는 시청자의 리액션이 롤러코스터를 탄다. 처음엔 ‘저건 쇼야’라며 느긋하게 바라보다가 정형돈 같은 캐릭터에 진짜 감정이입을 하며 좋아했다 미워했다 널을 뛴다. 알렉스-신애 같은 커플은 진짜 커플이 됐으면 좋겠다며 현실과 가상 쇼 속의 현실을 뒤죽박죽했다가, 그러면서도 이 가상 쇼가 현실로 이어지지 않는다 해도 아무도 개의치 않게 될 것이다. ‘에이 설마 아니겠지’와 ‘그래도 혹시’를 분주히 오가는 이 감정의 난반사는 이전의 리얼 버라이어티쇼가 주지 못했던 신선한 즐거움이다.

알렉스는 최고의 완소남이 됐고, 정형돈은 장가가기 힘든 남자가 되어 엄청 욕을 얻어먹고 있다. 거기다 출연자들은 자신의 미니홈피에 커플의 사진을 올려놓으면서 ‘행복하다’고 표현해 사람들을 헛갈리게 한다. 결국 각본에 따라 정해진 캐릭터를 연기하고 깜짝 이벤트를 벌이는 식의 역할극에 불과한 이 쇼에 보이는 시청자들의 감정이입이 쓸데없이 과도하다고 비난할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

아무도 이 쇼가 진짜라고 주장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믿지 않으면 그만이다. 그렇지만 이 진짜와 가짜 사이에서 시청자들은 즐겁게 자발적으로 허우적거린다. ‘무한도전’류가 내세운 출연진의 캐릭터 만들기와, 이전 ‘X맨’류의 짝짓기 프로의 재미와, 결혼 생활을 내세운 은근한 스킨십의 긴장감과, ‘몰래카메라’의 엿보기에 대한 만족감과, 방송과 인터넷을 결합한 ‘버즈 마케팅’까지 빨아들여 그 장점만을 결합한 이 프로는 최근에 등장한 가장 흡입력 강한 변종 리얼리티 쇼다.


이윤정씨는 영화 제작자로 활약한 문화통으로 문화를 꼭꼭 씹어 쉬운 글로 풀어내는 재주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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