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광복50년-경제발전 발자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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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광복후 지난 반세기동안 한국 경제는 한마디로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했다」고 표현해도 과언이 아니다.
경제 성장의 징표는 국민소득 1만달러,반도체 D램 생산량 세계 1위를 비롯해 철강 조강능력.조선 수주량.자동차 생산량 등에서 찾아볼 수 있다.지난 50년간 우리 경제가 걸어온 발자취를 더듬어 본다.
해방에 이은 한국전쟁으로 인해 폐허가 된 지난 53년(한국은행이 GNP통계를 처음 집계한 때) 우리나라의 국민총생산(GNP)은 13억5천만달러에 불과했다.1인당 GNP로 따지면 67달러였다.
그러던 것이 빠른 성장에 힘입어 지난해 GNP는 3천7백69억달러에 달했으며 올해는 4천5백70억달러로 늘어날 전망이다.
1인당 GNP도 올해는 1만1백90달러에 이를 것으로 예상되고있다. 42년만에 GNP는 무려 3백38.5배,1인당 GNP는1백52.1배 늘어난 셈이다.
이에 따라 우리나라의 경제 규모는 지난 60년 세계 37위에서 15위(92년 기준),1인당 GNP는 같은 기간 83위에서38위로 올라섰다.
수출이 우리 경제의 견인차 역할을 했다는데 이견을 보이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해방당시인 45년에는 수출 70만달러,수입 1백20만달러로 총 교역규모는 2백만달러를 밑돌았다.최근어지간한 중견기업 한 곳의 실적에도 못미치는 수 준이다.
그러나 지난해에는 총 교역규모가 2천억달러에 육박,세계 12위(93년 기준)로 뛰어올랐으며 올해는 2천6억달러(수출 1천2백50억달러,수입 1천3백50억달러)에 이를 것으로 예상된다. 교역규모가 50년만에 약 13만6천8백42배 늘어난 것이다. ***산업구조 광복 당시 우리나라에는 공장다운 공장은 손에꼽을 정도였다.
그러나 산업보국(保國)의 기치아래 경제개발계획이 본격적으로 추진되면서 서울 구로공단.울산 석유화학단지등 대형 공단들이 들어서 각종 공장들이 숲을 이루었다.
이 과정에서 초기에는 농업 또는 광공업이 대부분을 차지하는 산업구조가 제조업 중심으로 달라지면서 광공업의 비중이 53년 10.1%에서 70년대 중반에는 27.2%로 높아졌다.그후 서비스 산업이 급속도로 팽창한 결과 광복 당시 허리 가 잘록한 호리병모양이던 우리나라의 산업구조가 최근에는 3차산업이 비대한역삼각형으로 바뀌었다.외형상으로는 선진형으로 달라진 셈이다.
***임금 및 실업률 한국 경제의 성장 배경에는 무엇보다 우수하면서도 값 싼 노동력이 1순위에 자리잡고 있었다.
63년 우리나라 1인당 평균임금은 월 2천5백31원(전산업 기준)에 불과했고 10만원대를 넘어선 것은 15년 후인 78년이었다. 그러나 87년 「6.29선언」을 계기로 상황은 달라졌다.노사분규와 함께 근로자의 임금상승 욕구는 높아졌으며 그 결과 7년만인 94년 1백만원을 넘어섰다(1백9만8천9백84원). ***도로.철도 50년대 도로 총연장은 2만5천2백㎞에 불과했다. 그러나 70년 산업의 대동맥이라 불리는 경부고속도로가개통된 것을 시작으로 전국에 고속도로망이 깔리면서 지난해 우리나라의 도로 총연장은 6만1천2백96㎞로 늘어났고 전국은 「1일 생활권」으로 바뀌었다.
철도의 경우에도 해방직후인 46년 2천5백58㎞에 불과했던 것이 지난해 3천98㎞로 늘어났다.경부고속철도를 시작으로 전국이 고속철도망으로 연결될 날도 멀지 않았다.
***자동차 생산 우리나라에서 직접 자동차를 만들 것으로는 상상도 못했다.
49년 전국(남한)의 자동차 등록대수는 1만6천4백대에 불과했으며 60년대에도 군용차 개조등으로 연 2천~6천대수준의 자동차를 만드는데 그쳤다.
그러나 76년 첫 국산모델인 「포니」를 시작으로 우리도 명실공히 자동차 생산국 대열에 동참했다.85년 국산차가 처음으로 자동차의 본산인 미국 땅에 선보였으며 이제는 세계 곳곳에서 우리 차가 달리고 있다.
〈李鎔宅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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