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철환의즐거운천자문] 우리의 어머니들은 지금 분노하고 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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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우주선을 탄 최초의 한국인 얼굴이 TV에 떴다. 주인공이 중간에 교체되는 등 극적 요소가 적지 않았지만 절정의 순간을 흥미롭게 지켜본 시청자 규모는 정작 열 명 중 하나다. 총선 개표방송 역시 시청률이 높지 않았다. 승리한 측에서는 한 편의 드라마라고 자평하지만 냉정한 시청자는 한 편의 쇼 같다고 여기는 듯하다. 몇 년 만의 실제 상황보다 오히려 매주 하는 드라마에 더 끌리는 까닭은 무얼까.

드라마작가 때문에 사고 날 뻔했다는 말을 들은 기억이 난다. 방영 시간에 맞춰 급히 귀가하려다가 앞차와 부딪칠 뻔했다는 이야기다. 배우나 연출자보다 작가 이름이 먼저 나올 수 있다는 게 신기하다. 제목이 무엇이든 그냥 ‘이 사람 드라마’로 통용된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오랜 시간 시청자를 TV 앞에 잡아둔 사람. 작가 김수현 스토리다.

드라마 흡인력은 대체로 다섯 단계(D-R-A-M-A)의 과정을 거친 결과물이다. ①당신이 바라는 게 뭔데?(Dream) ②그야 물론 사랑과 행복이지.(Romance) ③그 방향으로 다가가면 되잖아?(Action) ④하지만 뜻대로 안 풀리는 이유가 뭘까?(Mystery) ⑤귀한 걸 얻으려면 현실을 부수고 용감하게 나아가야지.(Adventure)

‘김수현 드라마’ 역시 이 공식에서 크게 벗어나 있지 않다. ‘엄마가 뿔났다’는 ‘아날로그 세대와 디지털 세대의 패러다임이 공존하는 이 시대의 가족 이야기’다. 기획의도에 소상히 적혀 있다. 내가 뽑은 키워드는 ‘공존’이다. 작가는 공존을 가로막는 요소들을 곳곳에 포진시키고 그것을 제거하려는 전사(천사?)들을 고비마다 등장시킨다.

엄마(김혜자)가 뿔난 이유는 뭘까. 세 자녀의 혼인을 둘러싼 갈등 때문이다. 첫째(신은경)는 아이 딸린 이혼남(류진)과 교제 중이다. 아들(김정현)은 다섯 살 많은 여성(김나운)을 혼전 임신시켰다. 막내딸(이유리)은 다니던 회사의 사장 아들(기태영)과 예식을 앞두고 있는데 사돈댁(장미희)의 교만과 위세가 가관이다.

드라마의 성공요체는 액션이 아니라 리액션이다. 게시판을 보라. ‘뿔난’ 사람들이 전국적으로 모여 있다. 지지난주 2인분에 44만원이나 하는 한정식(물론 모르고 먹었다)을 사돈댁 물리치고 우겨서 계산한 후 억울한 나머지 차 안에서 펑펑 울던 장면에 전격 공감하더니, 지난주 세탁업자 ‘비하’하는 장면에 이르러서는 작가가 사과해야 한다는 ‘검사’쪽과 드라마를 앞뒤 제대로 보고 비판하라는 ‘변호사’쪽 배심원들이 뒤엉켜 설전을 벌이고 있다. 오프라인에서 부딪친다면 육박전이라도 벌어질 기세다.

작가는 문제를 야기한 게 아니라 문제를 제기한 것이다. 그것이 재능이든 재산이든 간에, 가진 자와 덜 가진 자가 사이좋게 지낸다는 건 오롯한 꿈에 불과할까. 이번 드라마에서 뿔난 엄마 이름이 한자다. 어떨 땐 환자로 들린다. 앓는 영혼의 소유자들이 엄마의 대리분노로 조금이나마 화를 삭이길 작가는 은밀히 바랄 것이다.

주철환 OBS 경인TV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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