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달아 높이곰 돋아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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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남편을 사랑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에 대한 깨달음이었다.
새삼스런 깨달음은 아니나 이토록 아프고 슬프게 실감하기는 처음이다.하필이면 외딴 섬의 선인장 무더기가 이 사실을 깨닫게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불모의 벼랑에 뿌리 박아 꽃을 피워 감미한 열매를 맺으려고 온몸에 가시를 돋워 사는 그 생태가 아리영 자신의 모습인듯 비친 탓일까.
-사랑하지 않는다.분명히 서로 사랑하고 있지 않는데 왜 함께살아야 하는가.
아리영은 입술을 깨물었다.
남편은 버트런드 러셀을 좋아했다.영국의 수학자요,철학자인 러셀은 핵무기 반대운동을 지도했고 기호논리학(記號論理學)의 기초를 닦았다.노벨 문학상 수상자이기도 하다.
남편의 책상엔 항상 러셀의 자서전이 반뜻하게 놓여 있었다.으뜸가는 애독서(愛讀書)였다.
하루는 방청소를 하다 무심히 그 책을 펼쳤다.연필로 밑줄 그은 데가 있어 훑어 읽다가 실색했다.
『…어느날 오후 나는 자전거를 타고 외출한 적이 있었다.시골길이었다.열심히 달리다가 갑자기 「아내를 사랑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발견했다.나는 아내와 성적(性的)인 관계를 갖고 싶은 욕망이 죽은 사실도 깨달았다.이러한 본능적인 욕구가 사라진사실을 숨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나는 아내에게 한방을 쓰지 말자고 제의했다.그날 나는 그녀에게 「사랑이 죽었음」을 고백하고 말았다….』 아리영은 충격을 받았다.최교수 사건 이전의 일이다. -무슨 생각으로 남편은 이 대목에 밑줄을 쳐놓은 것일까. 책장을 넘겨보니 러셀이 그의 친구와 주고 받은 편지편에 또밑줄이 그어져 있었다.
「고행(苦行)에 대한 안(案)」이라는 대목이었다.
『의무적인 방문을 할 것.의무적인 편지를 쓸 것.시나 산문을욀 것.영어를 다른 언어로 번역할 것.당신의 방을 깨끗이 정돈할 것.넌더리 나는 사람에게 환대를 베풀 것.』 고행하자면 이런 식으로 하라는 이야기는,이 여섯가지 행위가 러셀에게 있어 얼마나 고통스러운 것이었는지를 말한다.
「고행에 대한 안」에는 비록 없었지만 남편은 내심 다음과 같은 구절까지 포함시키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의무적인 섹스를 아내와 할 것.』 남편은 아리영의 「임신가능기간」 내내 하루도 거르지 않고 아리영을 찾았다.
아리영의 생리는 「30일형」이다.이런 여성의 경우 달거리가 시작된지 12일째 되는 날부터 20일째 되는 날까지의 9일 동안이 임신가능기간이다.남편은 9일간의 고행을 자원하곤 했던 셈이다. 밀착감이 없는 포옹.흡착감이 없는 교합(交合).뱀장어나미꾸라지의 어우러짐이었다.비상(飛翔)의 시간은 끝내 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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