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미로찾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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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그냥 내버려 두었다간 그녀의 얘기는 끝도 없이 깊이 들어갈 것만 같았다.
상상력과 광기는 서로 가까운 친척간이니 어느 선에선 서로 멀리 해 현실감을 갖는 게 좋다.채영이 환한 미소를 보냈다.
『당신과 함께 많은 이야기들을 만들고 싶어서요.선진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사람은 스토리텔러(story teller)예요.저는 당신이 삶으로 돌아와서 할 일이 훌륭한 스토리텔러가 되는 길이라고 생각해요.』 민우는 빙긋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건 당신이 할 일이오.나는 나대로 길이 있소.』 채영이 갑자기 머쓱해졌다.
『미안해요.제가 너무 흥분했나봐요.』 민우는 고개를 저으며 채영의 어깨를 안았다.
『그러나 당신과 아주 다른 길은 아니오.어쩌면 우리는 같이 길을 갈지도 모르지.나는 사실 당신 얘기를 들으면서 줄곧 한 가지 생각에 몰두해 있었소.그것은 다름아닌 주미리가 말한 것이무슨 뜻인가 해서지.주미리는 나에게 활력있는 삶 을 살 것과 젊은 날의 꿈을 포기하지 말고 추구하기를 원했어.나의 젊은 날의 꿈이 뭔지 알아요?』 채영은 자신없는 듯 조그맣게 대답했다. 『메시아…!』 『그것은 젊은 날의 망상이고 내 젊은 날의 꿈은 아마 이런 걸거요.』 민우는 잠시 꿈을 더듬듯이 고개를 의자에 젖혔다.민우는 마치 책을 읽듯이 더듬더듬 말했다.
『책임을 져야할 사람은 바로 우리였다.이 사회를 병들게 만들고 이 민족을 허약하게 수탈 속에 내버려둔 범인은 바로 우리라는 인간이었다.자연스러운 인간관계에서 회의없이 어쩔 수 없다고,당연하다고 받아들이는 사소한 모순,타협은 벌써 종속적이고 허약한 인간을 위한 기반을 단단히 다져 놓고 말았다.한 사회의 인간은 그 사회의 인간을 만든다.왜 병든 사회에 태어나서 앓다가만 죽어야 한단 말인가.가장 확실한 곳에 가장 탄력성 있고 가장 안정하게 적응을 하려는 인간이 형성되어 가고 있고 또 되어 왔다.약하기 때문에 적응을 하는 것이다.클만한 토양이 없었고 미지의 시련에 대한 두려움이 극도로 과장돼 온 우리 사회에서는 이러한 인간들이 주축을 이룰 수밖에 없었다.새로운 인간이탄생해야 한다.새로운 인간의 집결체로서의 성숙한 민족이 탄생하지 않으면 정권이 바뀌거나 혁명이 일어나도 모멸받고 착취받는 민족임을 면치 못할 것이고,민족 내부에서 암세포처럼 번져 있는인간은 결국 이상주의적인 지도자,인간들을 타락시키고 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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