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달아 높이곰 돋아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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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그들이 집으로 돌아온 것은 한나절이 훨씬 지나서였다.
자리를 깔고 누워 있는 아리영을 들여다보고 한참 서있더니 남편은 아무 말 없이 욕실에 들어가 샤워를 했다.
눈을 지그시 감고 자는 체했다.얼굴 마주하기가 겁났다.불결한것을 보는 두려움이었다.
아프다는 핑계를 대고 저녁식사 자리에도 나가지 않았다.
『많이 아픈 거야?』 아버지가 들어와 걱정했다.
『며칠 지나면 괜찮아질 거예요.아는 병이니까요.』 아리영은 한쪽 눈을 간신히 뜨고 대답했다.마음이 복받쳐 금방이라도 눈물보가 터질 것같았다.
『저 들어가도 될까요?』 아버지를 뒤따라왔는지 최교수가 안방문 앞에서 방안을 향해 물었다.
『아,들어오십시오.』 아버지가 선선히 맞아들였다.
『많이 편찮으신가봐요.저 때문에 너무 고생하신 것같애요.』 어떤 표정을 지어야할지 곤혹스러웠다.몸을 뒤척이고 일어나 자리에 앉았다.
『그냥 누워 계세요.』 최교수는 얼른 다가와 아리영을 껴안고자리에 도로 뉘려 했다.빨간 퀼로트 옷자락에서 향수 내가 풍겼다. 강한 역겨움을 느껴 최교수의 팔에서 몸을 빼돌렸다.
미묘한 그 거부의 몸짓에 최교수는 흠칫 놀라는 기색으로 잠시아리영을 응시했다.
『조섭하세요.』 그녀는 조용히 일어서서 절하고 방을 나갔다.
최교수를 따라 아버지가 나가고 대신 남편이 들어왔다.
『뭐라도 좀 요기를 해야 할 거 아니오?』 아리영은 돌아누운채 대답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전에 한 말이 생각났다.
『이것이 최악이라고 말할 수 있는 한 그것은 최악이 아니다.
』 셰익스피어의 희곡 『리어왕』에 나오는 대사의 한 구절이다.
이 남자는 아내가 그 현장에 있었다는 사실을 아직 모르고 있다.알려서 따질 것인가.아니다.자신의 입으로 말할 때까지 잠자코 있어야 한다.남편과 최교수의 관계가 장차 어떻게 전개되든 그들 스스로 말할 때까지 기다려야 할 것이다.이것 이 최악이라고 말할 수 있는 한 그것은 최악이 아니라 하지 않는가.
괴로운 밤을 지새우다 새벽녘 자동차가 떠나는 소리를 들었다.
최교수의 지프 소리 같았다.
일어나 나가보니 차는 이미 보이지 않았고 별채도 텅 비어 있었다.아리영 앞으로 남긴 쪽지가 탁자 위에 놓여 있다.머잖아 외국에 가게 될 거라는 내용이었다.
그간의 우정에 감사한다는 말도 곁들여져 있었다.
그녀가 교통사고로 죽은 것은 그 몇 시간 후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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