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책갈피] 안목은 없고 돈만 많던 페기 현대미술 최고의 후원자 되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3면

페기 구겐하임
앤톤 길 지음,
노승림 옮김,
한길아트,
792쪽, 2만5000원

마르셀 뒤샹, 이브 탕기, 콘스탄틴 브랑쿠시, 존 케이지, 잭슨 폴록…. 엑스트라만으로도 초특급 캐스팅이다. 주연은 생애 자체가 20세기 미술사가 된 전설의 현대미술 컬렉터 페기 구겐하임(1878∼1979), 조연은 그의 연인 혹은 남편이었던 사무엘 베케트·막스 에른스트 등이다.

BBC 출신 논픽션 작가 앤톤 길이 미출간 원고·일기·가십·전화통화 등 온갖 자료를 샅샅이 뒤져 페기 구겐하임의 생애를 입체적으로 살렸다. 시작이 흥미진진하다. 유대계 광산 재벌 구겐하임 가문에 태어난 페기가 타이타닉호 침몰로 아버지를 잃는 장면이다. 예술에 대한 동경과 호기심이 대단했던 페기는 세 명의 예술가 남편과 여러 명의 연인을 두고 현대미술의 후원자로 박진감 넘치는 일생을 보냈다.

그러나 엄마로서는 실패했으며, 사랑한 이들에게 그만큼 사랑 받지도, 일찌감치 알아보고 후원한 예술가들에게 그만큼 존중 받지도 못한 쓸쓸한 여성이었다.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당대 예술흐름에 대해 아는 바도, 본인만의 독특한 안목이랄 것도 없었던 부잣집 여성이 당대 예술가들과의 교류를 통해 최고의 현대 미술 컬렉터로 성장하는 과정이다. 자신의 취향에 확신이 없었던 대신 그는 허버트 리드·마르셀 뒤샹·알프레드 바 등 당대 최고의 예술적 감식안을 가진 이들에게 늘 귀를 열어두었다. 특히 그는 유럽의 초현실주의와 미국의 추상표현주의를 접목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는데, 이 같은 공로는 말년에야 진가를 인정받았다.

평생 모은 예술품은 자식들에게 단 한 점도 돌아가지 않았다. 현재 이탈리아 베니스에 있는 페기 구겐하임 미술관은 삼촌이 설립한 뉴욕의 솔로몬 구겐하임 미술관과 달리 르네상스 미술의 본거지에서 현대 미술을 볼 수 있는 이채로운 공간으로 자리잡았다.

책은 만만하지 않다. 800쪽에 육박하는 방대한 분량이다. 게다가 생소한 사람 이름도 그득하다. 그러나 인내심을 갖고 책장을 넘기면 모더니즘 미술의 현장을 가로지를 수 있다. 원제 『Peggy Guggenheim:The life of an Art Addict』.

권근영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