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orld in SEOUL] 서울 속의 ‘작은 마닐라’ 고국 물건 사면 정은 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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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혜화동 혜화로터리의 ‘필리핀 노천시장’. 상인도 손님도 필리핀인인 ‘서울 속 마닐라’가 올해 10년을 맞았다. 서울에 사는 필리핀인들은 주말을 이곳에서 주로 보낸다. 한국에서 구하기 어려운 필리핀 물품과 음식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진=안성식 기자]

일요일인 지난달 30일 낮 서울 대학로 혜화동로터리 혜화동성당 앞의 ‘필리핀 노천 시장’.

“코모 에스타스? 하우 아 유? (Como estas? How are you?)”

좌판에 망고·암팔라야(오이처럼 생긴 필리핀 야채)·룸피아(밀 전병 튀김) 등 필리핀산 먹거리를 늘어놓고 파는 한 여성이 때마침 좌판 앞을 지나가는 동년배 여성을 보고 스페인어와 영어를 한꺼번에 쓰며 아는 체를 한다. 이들은 친분이 깊은 듯 악수를 하더니 타갈로그어(필리핀 고유어)로 대화를 이어간다. 상인도 행인도 같은 필리핀 사람이다.

일요일마다 혜화동로터리에 서는 필리핀 노천시장이 올해로 10년을 맞았다. 한국에서 구하기 어려운 필리핀 물품을 서울에 사는 필리핀 사람들 간에 사고파는 공간이다.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까지 혜화동로터리 동성고등학교 앞에서 혜화동 천주성당 사이 100m 길이의 보도는 필리피노로 붐빈다. 필리핀에서 들여온 식품류, 화장품, 삶은 오리알, 국제전화카드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물품이 거래된다.

노천시장이 형성된 것은 혜화동성당에서 이뤄지는 ‘필리핀 미사’ 덕분이었다. 혜화동성당은 일요일 오후 1시30분부터 한 시간가량 필리핀 가톨릭 신자를 위해 미사 공간을 제공하고 있다. 매주 2000명에 가까운 신자가 오다 보니 이들을 대상으로 한 노천시장이 자연스럽게 형성됐다. 부활주일에는 5000명 정도가 모이기도 한다.

“필리핀은 국민의 90% 이상이 가톨릭 신자예요. 그렇다 보니 한국에 사는 필리피노들은 여기처럼 성당을 빌려 자체적으로 미사를 보죠.”

주한 필리핀 커뮤니티 중 하나인 ‘혜화동 모임’ 회장 에드가 발리스타의 설명이다. 서울살이 17년째인 그는 현재 서울의 한 학원에서 영어강사로 일하며 회원이 300명인 혜화동 모임을 이끌고 있다. 함께 미사를 보고, 노무·법률·국제결혼 등에 대한 정보를 주고받는 친목 모임이다. 수도권의 안산, 수원, 고양, 남양주 마석, 포천 가산과 대구·부산·대전 등지에서도 필리핀인들이 모여 미사를 보는 곳이 있다.

혜화동성당 앞에 노천시장이 처음 생겼을 때 이를 못마땅해하는 한국인 신자들도 있었다 한다. 그러나 시장 상인과 손님 역시 같은 이 성당에서 미사를 보는 가톨릭신자라는 점에서 차츰차츰 공감대가 생겼다.

에드가에 따르면 현재 한국에 거주하는 필리피노는 6만 명 정도. 지난해 7만 명까지 됐지만, 한국보다 이주노동자에 더 우호적인 캐나다로 옮겨 가는 사람들이 늘면서 숫자가 줄었다.

필리핀 노천시장의 역사가 쌓이면서 일요일 이곳은 서울 속의 ‘작은 마닐라’가 된다. 필리핀 풍속을 맛보고자 하는 한국인들도 제법 눈에 띈다. 이곳 식당에선 야채와 고기를 다져넣은 밀 전병을 튀겨낸 ‘룸피아’, 볶음밥 비슷한 ‘시난개그’, 야채를 넣고 볶은 국수인 ‘판싯칸톤’ 등 필리핀 전통 음식을 맛볼 수 있다. 노점 식당에서 ‘룸피아’를 막 먹고 나온 김영웅(28·대치2동·회사원), 송아람(22·여·신림동·대학생)씨는 “필리핀 아줌마가 한국어로 설명해줘 메뉴를 골랐는데 매우 맛있었다”고 말했다. 그들은 “후식으로 코코넛 주스를 사먹을 생각”이라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노천시장과 함께 인근 동성고등학교 운동장도 필리피노들의 모임 장소가 됐다. 주한 필리피노들은 13일부터 매주 일요일에 농구 18개 팀이 참여하는 ‘스포츠 리그’를 개최한다. 가을까지 이어지는 이 행사도 올해로 10년이 넘었다.

글=성시윤 기자, 사진=안성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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