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영호북극리포트>2.출발!雪의 사막으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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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0면

이제 떠난다.언제나 준비단계가 더 힘들다.그간 식량구입.장비제작 등으로 너무 바쁘게 움직였다.어젯밤까지 벌써 며칠째 밤샘이다.막상 떠나는 마당까지 마음이 바쁘고 자꾸만 장비 리스트를쳐다보게 된다.아예 눈을 감아보자.빠진 장비는 러시아에서 구입하자.원정성공엔 무엇보다 대원들의 팀워크가 관건이다.과연 그들이 1천8백여㎞를 걸어서 갈 수 있을까.적어도 석달간 우리는 가족이상으로 친해져야 한다.마음을 비우고 서로 희생해야 한다.
그러나 일단 그들을 선발한 내눈을 믿자.KE011편으로 서울을떠난지 약9시간.모스크바 세르미티에보공항이 눈에 들어온다.여기서 하루 자고 모레 페테르부르크로 이동,최단시간 안에 북극해 전진기지인 슬레드니섬까지 다시 이동해야 한다.
▲3월8일 (페테르부르크) 운행개시 전의 이동시간은 짧을수록좋다.한시라도 빨리 베이스캠프(슬레드니)에 도착해야 하는데 마음만 바쁘다.미국의 윌 스티거 개썰매팀은 이미 3일 캐나다를 향해 출발했다는 현지 소식이다.라인홀트 메스너는 동생과 단 둘이 4일 북극 해에 첫발을 내디뎠으나 사흘만인 어제 다시 베이스캠프로 철수했단다.메스너의 철수이유는 자세하지 않지만 전열을재정비하고 다시 도전할 것이 분명하다.
올해는 북극이 유난히 원정러시를 이루고 있다.외국팀과의 경쟁을 의식하진 않지만 결과를 놓고는 어차피 비교대상이 될 것이 확실하다.메스너는 더구나 북극해 「무보급 도보횡단」이란 점에서우리와 원정목적.경로까지 똑같지 않은가.
▲3월12일(출발) 맑음,온도 -38℃ 드디어 D데이.낮 12시30분 슬레드니 베이스캠프를 헬리콥터로 출발해 2시쯤 섬끝인 아크티췌스키 상공까지 날아왔다.이제 땅으로 상징되는 모든 것들-문명과 사회와 가족,인간의 역사 등-과 여기서 이별이다.
발아래 끝없는 난빙(難氷)이 펼쳐지며 험난한 앞날을 예고한다.대원들과 취재진들도 기가 질린듯 헬리콥터 창밖에서 눈을 떼지못한다. 조종사인 스타니슬라프가 조금이라도 우리를 편안하게 해줄 생각으로 난빙대 한가운데 내려주겠다고 제안한다.얼음이 칼처럼 솟은 난빙대에선 하루 3~4㎞전진이 고작이다.이를 수십㎞나비행기로 건너뛰어 주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조종사의 고마운(?)제안을 물리치고 육지가 끝나는 곳으로 회항해 달라고 주문했다.우리 원정의 완결성과 질을 위해,그리고 과정상의 보람을 위해 단 1㎝라도 편법에 의해 거리를 단축시킬 순 없다.실패와 성공은 최선을 다한 그 다음의 문제다. 헬기에서 내리자마자 눈썹에 성에가 달라붙어 시야가 뽀얗게 변한다.
조종사와 작별하고 오후3시부터 2시간 운행.북위 81도16분35초 지점에 텐트 두개동을 쳤다.오늘 운행거리는 불과 1㎞밖에 안된다.이 넓은 북극천지에 이젠 우리일행 여덟명(지원1,취재진2명 포함)뿐이다.고난과 좌절,꿈과 모험이 내 일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다.오후 8시30분,베이스캠프와 교신을 시도했으나전혀 응답이 없다.오랜만에 대자연에 안긴 자유를 만끽하며 이내잠을 청한다.북극의 밤이 완벽한 침묵으로 나를 자유롭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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