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포커스>경수로와 쌀,冷戰을 녹일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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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북한의 협상전략에는 실로 감탄을 금할 수가 없다.평지돌출처럼핵문제를 일으켜 세계여론의 비난을 한몸에 받는가 싶었는데 결과적으로는 45억달러짜리 경수로를 확보하고 10억달러 이상의 추가원조를 사실상 약속받고,미국과의 관계개선 일정 을 대폭 앞당기는 외교적 성과를 올렸다.
당연히 일본은 평양가는 버스를 놓칠까 안달하고,북한이 이번에는 쌀이라는 새로운 카드를 내밀었다.타이밍이 절묘했다.일본에는처치곤란한 묵은 쌀 80만t 이상이 창고에 쌓여 있다.자민당의가토 고이치 정조회장(政調會長)이 다른 정치인들 을 제치고 쌀교섭을 위한 대북창구를 차지했다.
북한과 일본의 국교가 정상화되면 30억에서 50억달러의 차관이 북한에 제공될 것으로 예상되는 마당이라 한때는 가네마루 신,그리고 지금은 사회당이 차지하고 있는 대북교섭창구는 복마전의열쇠꾸러미 같은 것이다.
예상대로 한국이 북한에 대한 쌀 원조라면 우리가 먼저라고 나섰다.그결과 도쿄(東京)와 베이징(北京)에서 북한에 쌀 먼저주기 경쟁이 벌어졌다.
북한은 이 일본카드를 적절히 쓰고 있는 것이다.
핵과 경수로를 가지고 북한은 한국을 따돌리고 미국과 직접 협상을 벌여 원하는 바를 모두 얻었다.그대신 미국은 원래의 의도대로 핵비확산조약(NPT)체제의 유지에 북한의 협조를 얻고,북한과의 관계를 개선함으로써 한반도문제를 韓美관계에 서 韓美와 北美관계의 차원으로 확대해 한국을 한층 쉽게 다루는 지렛대를 갖게 됐다.
일본도 경수로협상의 타결과 쌀원조를 통해 필요할 때는 한국을상대로 북한카드를 적절히 구사할 수가 있게 됐다.앞으로 일본은남북간에 적당한 경쟁을 붙여놓고 양쪽과의 관계를 유리하게 끌고갈 것이다.
북한과의 수교를 포함한 관계개선에서도 일본이 미국을 앞질러도놀랄 일이 아닐 것이다.
한국은 무엇을 얻었는가.경수로에서나 쌀에서나 일단은 주기만 하고 받은 것이 없다.경수로제공을 남북대화재개의 조건으로 얽어매려 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다.한국은 쌀과 경수로 모두에서 북한 장단에 춤만 추고 있는 모습이다.
韓美.韓日간의 정책협조를 아무리 강조해도 미국과 일본의 북한접근 속도를 우리 마음대로 조절할 수는 없는 현실이다.이런 점을 감안해 우리는 『두 나라는 우리의 우방인데…』라는 종래의 환상을 버리고 경수로에 이은 쌀문제도 앞으로 남북 관계 전개의큰 틀에서 보지 않을 수 없다.
북한의 온갖 예방조치에도 불구하고 경수로는 북한사회에 트로이목마의 효과를 가져올 것이고,쌀제공은 남북대화로 연결될 것이고,北美.北日관계의 개선은 북한에 개방과 개혁의 바람을 일으킬 것이다. 남북관계에서 통일이전의 단계에서 반드시 필요한 것은 분단관리체제의 실현이다.이 체제는 남북한이 분단의 잠정적인 동결에 합의하고 서로의 체제를 인정하고 평화공존을 하면서 모든 분야에서 언젠가 있을 통일에 필요한 대화와 교류를 넓혀나 가는단계다. 우리의 정서가 용납하지 않는다고 해도 핵위기로 시작된北美.北日관계의 개선은 이미 성사된 한러.한중관계의 정상화와 함께 한국분단의 동결로 이어지고 있다.
북한의 까다로운 조건으로 꼬이기만 하는 것같은 쌀협상도 한걸음만 앞으로 나가면 남북대화와 분단관리체제로 이어질 수 있는 것이다.바로 이점에 북한과의 협상을 남북문제의 큰 틀에서 보아야 할 이유가 있다.
〈국제관계大記者.常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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