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0조분의1’ 기술로 빛을 만든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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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0조분의 1, 전문용어로 펨토(femto)라고 한다. 이런 극미세 분야에 도전하는 이들이 있다. 포스텍(포항공대) 부설 포항가속기연구소. 이름만 들어서는 무얼 하는 곳인지 짐작하기 어려운 이곳을 14일 찾았다. 연구원들은 여기서 펨토의 찰나에 원자와 분자의 세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규명하기 위해 밤낮을 잊고 산다. 화학반응에서 분자들이 어떤 식으로 원자나 전자를 주고 받는지 그 과정을 추적하는 것이다.

이문호(54) 소장은 “빛을 생산하는 곳이기 때문에 한마디로 빛 공장(light factory)”이라고 설명했다. 일반에겐 거의 알려지지 않은 이 연구소가 태동한 지 20년을 맞았다. 빛 공장이라는 설명도 와닿지 않아 그동안 어떤 연구성과가 있었는지 말해달라고 했다. 그는 “지금까지 국내 연구논문 가운데 세계적인 과학저널 ‘네이처’의 표지를 장식한 게 3건인데, 그중 2건이 우리 연구소의 방사광 가속기를 이용한 것이었다”고 말했다. 나머지 한 건은 엉터리로 밝혀져 등록이 취소된 황우석 박사의 줄기세포 배양 기술이다.

좀 더 일상 생활에 와닿는 결과물은 없냐고 채근했다. 이 소장은 삼성전화 휴대전화 얘기를 꺼냈다. 삼성이 2001년 휴대전화용 광통신 반도체를 개발했는데 불량률이 70%를 넘었다. 삼성 연구팀은 아무리 애써도 원인을 찾을 수 없다며 가속기연구소를 찾아왔다. 여기서 X선 비파괴 검사를 해보니 반도체 소자가 뒤틀려 있었고, 납땜용 납에 불순물이 많다는 사실을 찾아냈다. 그 뒤 불량률이 10%로 떨어졌다. 삼성 애니콜 신화에 이 연구소가 큰 기여를 한 것이다.

방사광 가속기는 생명공학·나노·반도체·재료공학 등 요즘 첨단 산업 연구에 없어서는 안 될 귀중한 장치다. 이 소장은 “이 연구소만큼 우리나라의 첨단 기술 발전에 기여한 곳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1988년 4월 건설추진본부가 출범했고 94년 말 완공됐다. 3세대 가속기로는 세계 다섯 번째였다. 지금은 주요 선진국을 중심으로 17기가 가동 중이다. 여기다 건설 중인 12기를 합치면 모두 29기에 이른다. 기술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여러 나라들이 그 중요성을 깨달은 것이다.

가동 초기 이곳을 찾는 학계와 기업 연구진들은 한 해 70∼80명에 불과했다. 2001년에야 1000명을 넘어섰다. 그 뒤 이 연구소가 ‘첨단 기술의 자궁’같은 곳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과학자와 엔지니어들이 몰려들었다. 지금까지 모두 1만5000명이 이곳을 방문해 다양한 프로젝트를 수행했다.

남상훈(51) 부소장은 “연구소는 정부 예산과 포스코 기금으로 지어져 운영되고 있다”며 “지금까지 투입된 돈은 모두 4300억원”이라고 밝혔다. 국가적 연구시설이기 때문에 일반에게 개방돼 있다. 이용자들이 몰려 요즘은 신청서를 내고 몇 달씩 기다려야 한다. 남 부소장은 “연구결과를 개방하는 경우엔 무료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엔 하루 이용료가 100만원”이라고 말했다.

요즘 이 연구소가 가장 큰 관심을 쏟고 있는 분야는 맞춤 의약품 개발이다. “인체의 단백질 구조에 이상이 생기면 병이 난다. 어느 단백질이 어떻게 일그러졌는지 알아야 거기에 맞는 약을 개발할 수 있다. 방사광 가속기는 단백질 구조 파악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 이 소장은 이렇게 설명했다. 2003년 9월 네이처 표지 논문으로 실렸던 조중명 박사의 연구도 이 분야와 관련된 것이었다. 현재 크리스털지노믹스란 바이오 벤처기업을 경영하고 있는 조 박사는 이 연구소를 자주 이용하는 사람 가운데 한 명이다.

2005년 10월 네이처 표지를 장식했던 김경규 성균관대 의대 교수의 논문도 유전자(DNA) 접합부위 구조를 가속기로 분석한 것이었다. 휴대전화용 초소형 정밀렌즈, 고온 세라믹 개발도 이 연구소에 의존하고 있다. PPM 단위의 심장병을 진단하며, 나노 크기의 로봇 제작도 이 연구소 덕분에 가능해졌다.

이 연구소에서 장기 프로젝트를 수행하고 있는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의 최근화(44)박사는 “현재 X선을 활용해 나노 구조를 분석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문호 소장은 “첨단 기술 경쟁에서 선진국에 밀리지 않으려면 펨토 과학과 나노 연구를 동시에 할 수 있는 4세대 가속기도 빨리 지어야 한다”고 말했다.

포항=심상복 기자

◇방사광 가속기(light accelerator)=방사광은 빛의 속도로 움직이는 전자가 자기장 속을 지나면서 방향을 틀 때마다 나오는 빛이다. 가속기는 이 빛을 가속하는 장치다. 방사광을 관으로 유도해 각종 장치를 만들어 다양한 연구를 한다. 대표적인 분야가 생명공학·반도체·기계공학·화학·재료공학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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