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달아 높이곰 돋아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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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딸 내외가 돌아간 집안은 썰물이 쓸려간 바닷가처럼 텅 비어 있다. 마냥 허전하고 마음 아프다.텅 빈 모래밭에 상실감이 새밀물처럼 닥쳐 그 쓰린 마음을 적신다.
딸이 시집갔음을 비로소 실감한다.
연옥의 방 한가운데 털썩 주저앉았다.
왠지 울음이 복받친다.실컷 울기라도 하면 직성이 풀릴까.그러나 울 수도 없었다.길례를 따라 뒤뚱거리며 쫓아온 동해가 말간눈을 크게 뜨고 쳐다보고 있다.같이 놀아주지 않을까 바라는 눈치다. 동해를 데리고 안방으로 돌아왔다.
결혼식 답례 편지를 써야 했다.뭐라도 해야 마음이 잡힐 판이다. 그러자면 동해가 혼자 조용히 놀도록 놀거리를 먼저 주어야한다. 커다란 색종이 여러 장을 동해 앞에 놓아주고 찢어 보였다.길게도 찢고,조각조각으로도 찢고,찢은 것을 구겨 보이기도 하고,다시 펴보이기도 했다.
『자,너도 해봐.이렇게 짜악! 옳지,우리 동해 참 자알하네!』 동해의 손을 잡고 함께 찢는다.동해가 깔깔거리고 웃는다.
『그래,그렇게 놀아라.』 길례는 방 한구석의 탁자에서 답례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포목점 여장부한테도 쓰고 서여사한테도 썼다.
-아리영한테도 써야겠지.그러나 어디로 부칠 것인가.목장으로?아니면 서울집? 길례는 달력 못에 걸려 있는 열쇠를 쳐다봤다.
저 열쇠는 어쩌다 저 자리에 십자가처럼 박히게 되었는가.열쇠보는 것이 두려웠다.
남편은 계속 저 열쇠 임자를 찾을 것이다.반뜻하고 꼼꼼한 성격이 분실물을 옆에 두고 그냥 보아넘기지 못하는 것이다.
『동해 할머니댁 열쇠는 아닌 모양이야.』 어젯밤 남편의 말투에서도 그런 기미를 느꼈다.
남편이 열쇠 임자를 찾는 노력을 할 때마다 길례는 싫든 좋든아리영 아버지 생각을 할 수밖에 없다.시니컬한 일이 아닌가.
그러다 어느날엔가는 홀연히 저 열쇠를 들고 나가 아리영 아버지집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버리는 것은 아닐까.
불안에서의 탈출.
불안에서 벗어나기 위해 차라리 그 불안의 핵심 속으로 뛰어 들어가고 마는 것은 아닌지.
커튼 사이로 새어 들어온 햇살이 크리스털알에 닿았다.크리스털이 투명한 생물처럼 빛을 뿜는다.진보랏빛이다.
온몸이 굳어오면서 강한 충격을 받았다.무당춤을 추던 어머니의눈이 그 진보랏빛 크리스털에 포개져 보였기 때문이다.
쾌감의 절정에서 늘 나타난 어머니의 눈.아리영 아버지와의 합환(合歡)때부터 사라진 어머니의 눈이 왜 저기에 또 나타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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