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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신화의 몰락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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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크리스 가드너는 가난해 대학을 나오지 못했다. 부인은 달아났다. 겨우 입에 풀칠하면서 밤에는 아들과 노숙자 쉼터를 헤맸다. 그래도 그는 부자가 되고 싶었고, 성실했다. 투자은행인 베어스턴스는 그의 가능성을 알아보았다. 가난하고(Poor), 똑똑하며(Smart), 부자가 되려는 강한 욕망(Deep desire to be rich)을 중시하는 이 회사의 PSD 채용 기준에 딱 맞았다. 학벌과 인맥을 따져 아이비리그 출신만 뽑는 경쟁사들과 달랐다. 베어스턴스에 들어간 가드너는 억만장자가 됐다. 재산은 모두 어려운 이웃에게 기부했다. 그의 실화를 바탕으로 지난해 나온 영화가 ‘행복을 찾아서’다.

“나에겐 꿈이 있습니다. 팩시밀리 회사에 들어가 베어스턴스를 담당하는 영업사원이 되는 겁니다. 이 회사는 팩시밀리가 공짜인 양 마구마구 주문하고 있습니다.” 16년간 베어스턴스 CEO를 지낸 앨런 그린버그의 잔소리다. “오해하는 것 같은데, 페덱스는 우리 자회사가 아닙니다. 지난달 택배비용만 5만 달러입니다. 우편을 이용하세요. 우표 붙이는 법을 모르면 그린버그라는 남자에게 전화하세요.” 그는 클립 하나, 종이 한 장도 아끼라고 극성이었다. 그의 익살스러운 잔소리를 모은 책이 베스트셀러 『회장님의 메모』다. 그래도 성과급 잔치 때는 누구보다 손이 컸다. 빳빳한 현금 뭉치를 봉투에 넣어 주었다.

“상식 경영으로 이 회사는 월가에서 가장 안정된 투자은행이 됐습니다. 사람들이 왜 이 회사에 투자하지 않는지, 나는 그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베어스턴스 주식에 대한 매수 추천이다. 그것도 워런 버핏의 입에서 나온 이야기다. 그런 베어스턴스가 망했다. 1923년 설립 이후 재작년까지 83년간 한 번도 빠짐없이 흑자를 낸 전설적인 회사. 2001년 닷컴 붕괴 때도 한발 앞서 주식을 깔끔하게 정리하면서 신화를 쌓았다. 이런 베어스턴스가 망했으니 ‘대공황 정도의 위기’나 ‘종말론’ 단어까지 등장한다.

그러나 찬찬히 살펴보면 굳이 공포에 떨 일이 아니다. 베어스턴스는 미국 5위의 투자은행. 다른 분야는 고만고만한데 유독 주택저당채권(MBS)에서만 압도적 1위다. 6년 전 그린버그 회장이 떠난 이후 상식이 무시된 것이다. 주택채권에 ‘몰빵’한 게 화근이었다.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담보대출) 위기로 베어스턴스 신화는 무너졌다. ‘상식 경영’으로 성공했다가 망하면서도 ‘상식 경영’의 중요성을 다시 일깨워주고 있다.

이철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