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EO 리포트] "한국기업 빚 너무 적어 문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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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릴린치 증권이 9일 한국 기업들의 부채비율이 너무 낮아서 문제라는 보고서를 내놨다. 외환위기 이후 '빚 공포증'에 걸린 기업들이 그동안 부채를 줄이는 데는 성공했지만, 재무구조가 선진국 수준으로 나아진 지금까지도 현금을 회사 안에 쌓아두고만 있다는 것이다. 지난해 9월 기준으로 증권거래소 상장기업들의 평균 부채비율은 108.3%. 미국 제조업체들의 부채비율(2002년 말 167.3%)보다 훨씬 낮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빚이 적다는 게 반드시 기업에 유리한 것만은 아니라고 지적한다.

부채비율을 낮추는 것이 능사가 아니라 빚을 지더라도 기업의 가치를 올리는 게 기업의 목표가 돼야 한다는 얘기다.

메릴린치증권은 국내 기업들이 돈을 벌어 빚을 갚는 데 주력하기보다 신규 투자를 하거나 인수.합병(M&A)을 통해 기업의 규모를 늘리고 장래의 수익성을 높이는 데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게 아니라면 차라리 ▶배당금을 늘리거나▶자사주를 매입해 소각하는 것이 주주 이익을 올리는 일이라고 말했다.

이원기 메릴린치증권 전무는 "국내 기업을 방문하는 외국인 투자자들은 한결같이 막대한 현금 보유액으로 무엇을 할 계획이냐고 묻는다"며 "신규 투자나 자사주 매입 등을 통해 기업가치를 올려야 국내 기업들에 대한 평가도 높아진다"고 말했다.

◆ 빚은 줄이고 현금은 늘려=외환위기 이후 국내 기업들의 평균 총부채 비율은 314%에서 108%로 떨어졌다. 몇몇 우량기업은 벌써 몇년째 아예 빚이 한푼도 없는 '부채 제로'상태다.

벌어들인 돈을 그저 현금으로 쌓아놓고 있는 기업도 늘고 있다. 삼성전자의 현금 보유액은 8조원에 가깝다. 현대차도 5조원 이상을, 삼성SDI도 약 7000억원을 현금으로 갖고 있다.

메릴린치의 李전무는 "지금 같은 저금리 상황에서 수조원의 현금을 갖고 있는 것을 현명한 경영전략이라고 할 수 없다"며 "적극적으로 기업가치를 올리는 데 현금을 사용하는 기업과 그렇지 못한 기업 간의 주가 차별화는 곧 현실로 닥칠 것"이라고 말했다.

외국의 유명 기업들을 보면 필요하면 빚을 얻어서라도 투자를 한다. 세계적 기업인 GE의 지난해 말 순부채(부채-현금)비율은 201%가 넘는다. IBM은 57% 수준이다.

그러나 삼성전자의 순부채비율은 -24.9%, 현대차는 -19.7%에 이른다. 빚은 없고 쌓아둔 현금은 많다는 뜻이다.

◆ 왜 그런가=기업들도 할 말은 있다. 우선 투자할 곳이 마땅치 않다는 것이다.

삼성그룹 한 임원은 "외환위기 이후 재무구조가 나쁜 상당수 기업이 망했다는 사실에서 배운 학습효과도 있지만, 근본적으론 투자할 곳이 없으니 번 돈으로 빚을 갚아 부채비율이 낮아지는 현상이 벌어지는 것"이라고 말했다. 한 신용평가회사 임원은 "부채비율이 떨어진 것은 그만큼 좋은 수익을 거둘 수 있는 투자 대상을 찾기가 어려워졌다는 방증"이라고 진단했다.

현명관 전경련 부회장은 "무엇보다 자신감이 문제"라고 말했다. 기업가 정신을 북돋워주는 사회적 분위기가 형성돼야 투자심리가 제대로 살아날 것이란 지적이다.

그는 특히 "당해년도 이익.주가 등 단기 경영지표로 최고경영자(CEO)의 업적을 평가하는 미국식 경영자 평가방식이 외환위기 후 확산됐다"며 "이런 여건에서 적어도 3~4년 후를 내다보는 투자를 결정하기 어려운 실정"이라고 말했다.

김영욱 전문기자.이상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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