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詩)가 있는 아침 ] - '멍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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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최승호(1954~) '멍게' 부분

멍청하게 만든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생각을 지워버린다

멍게는 참 조용하다
천둥벼락 같았다는 유마의 침묵도
저렇게 고요했을 것이다

허물덩어리인 나를 흉보지 않고
내 인생에 대해 충고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멍게는 얼마나 배려깊은 존재인가
(중략)
멍!
소리를 내면 벌써 입안이 울림의 공간
메아리치는 텅빈 골짜기
범종 소리가 난다



안토니 가우디가 설계한 성가족 대성당 사진을 본다. 1883년 지어지기 시작한 이 성당은 현재도 완공을 향해 진행 중이다. 뾰족한 첨탑들만 제외하면 성당의 모습은 얼핏 멍게의 모습을 닮아 있다. 신성한 성당과 멍게…. 잘 어울리지 않는다. 그런데도 나는 멍게 속으로 들어가고 싶다. 한없이 못 생기고 어수룩한 그 공간 어딘가에 우리를 가장 잘 이해해 주는 신이 머무르고 있을 것만 같다. 멍! 범종 소리처럼 울리는 멍게. 허물덩어리인 우리의 인생을 침묵으로 감싸 안아주는 멍게!

곽재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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