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판공적자금 ‘묘약일까 독약일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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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2면

11일(현지시간) 벤 버냉키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이 던진 ‘극약 처방’은 일단 약효를 냈다. 당일 뉴욕 증시는 5년래 가장 큰 폭으로 상승했고, 12일엔 아시아 증시도 일제히 반등했다. FRB가 내놓은 처방의 핵심은 주택담보대출 연계 증권(MBS)을 FRB가 보유한 국채로 바꿔 주는 방식으로 2000억 달러의 긴급 자금을 지원하겠다는 것. 사실상 세금으로 부실 금융회사를 살려 주겠다는 것이니 ‘미국판 공적자금’ 인 셈이다.

자칫 부실 책임이 있는 금융회사들의 책임을 면제해 줘 ‘도덕적 해이’ 논란을 일으킬 수 있는 이런 초강수가 동원된 것은 상황이 그만큼 심각했기 때문이다. FRB가 긴급 대책을 내놓기 하루 전인 10일 대형 투자은행인 베어스턴스가 유동성 위기에 빠졌다는 소문이 돌면서 미국 증시는 급락했다. 금융시장은 일시에 마비됐고 급기야 최우량 등급의 MBS까지 거래가 어려운 상황으로 치달았다. 월가는 당시 긴급 금리인하 조치가 나올 것이라고 예상했다. 연준이 18일에나 열릴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를 기다릴 수 없는 상황이라고 봤기 때문이다. 하지만 버냉키는 한발 더 나갔다. 금리인하 ‘약발’만으로는 사태 해결이 어렵다고 판단한 것이다. 금리를 낮춰봐야 시장이 얼어붙어 거래가 되지 않으면 돈은 돌지 않는다.

‘국채 임대방식’(TSLF·Term Securities Lending Facility)으로 불리는 새 지원책은 국채 전문 딜러가 매주 한 번씩 열리는 경매에서 MBS를 담보로 국채를 빌릴 수 있게 했다. 정부가 보증한 ‘기관 연계채’는 물론 민간이 발행한 우량증권도 대상이 된다. 이럴 경우 딜러들은 안심하고 금융사들이 내놓은 MBS를 받아 줄 수 있다. 마비 상태에 빠진 MBS 거래시장의 숨통을 터 주는 동시에 금융사들이 유동성을 확보하게 하는 ‘이중 효과’를 노린 것이다.

이에 대해 노무라증권의 데이비드 레슬러 수석연구원은 “그간 연준이 내놓은 조치 중 가장 의미 있는 것”이라고 평가했다. 하지만 묘약이 될지, 극약이 될지는 더 두고봐야 한다는 반응이 많다. 이번 조치가 당장의 고통만 줄여 주는 ‘진통제’일 뿐이라는 시각도 있다. 지난해 9월 이후 연준은 금융사들에 1조 달러에 달하는 자금을 직·간접적으로 지원했지만 사태는 더 나빠지기만 했다. 서브프라임 사태의 진원지인 미국 주택시장의 불안도 여전하다. ING자산운용 제임스 카우프만 채권사업부 대표는 “새로운 조치를 내놓을 때마다 그 효과가 지속되는 시간은 점점 짧아지고 있다”고 말했다.

한번 진통제를 쓰기 시작하면 내성이 강해지기 마련이다. 월가는 벌써 다음 조치를 기다리고 있다. 월스트리트 저널은 11일 “이번 조치는 금융사들이 보유한 기관 연계채를 연준이 직접 사주길 바라는 월가의 기대에는 못 미쳤다”고 전했다.

조민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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